<몽실언니>를 읽고
<몽실언니>를 처음 읽은 건 1년이 채 안 되었다. 작년 이맘때 생활기록부를 마감한 빈 교실에서 심심한 참에 책을 잡았는데, 궁상맞은 모양으로 울면서 퇴근했던 기억이 선하다. 어제도 자기 전에 미리 조금 읽어두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잡았다가 해 뜨는 걸 보았다. 몽실언니에게는 사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작품에서 몽실이는 참 많은 장소를 이동한다. 살강에서 댓골로 도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다시 고모 손길에 댓골에서 노루실로, 북촌댁 만삭 알리러 샛들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전쟁을 겪고는 고모 사시는 개암나무골로 갔다 마음 아프게 돌아오고. 하는 수 없이 댓골 엄마를 보러 갔다가 김씨에게 맞은 난남이를 업고 다시 노루골로. 이후 최씨네 집에서 잠시 편안한 생활을 하지만 전쟁통에 다리 다친 아버지와 함께 다시 노루골로. 댓골 엄마의 투병 소식에 그를 보러 다녀오지만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모진 취급과 함께 돌아오고. 아버지를 모시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난남이마저 입양을 간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특히나 전쟁 중에는 그렇다.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에 대해 일전에 얘기한 바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어 하고, 몽실이는 자신의 상황을 팔자라는 패러다임으로 표현한다.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팔자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무력하다. 내 팔자거니, 하고 살아가는 그 무력함이 나를 너무 슬프게 해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계속해서 함께 슬퍼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몽실이를 감히 비난할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한에서 최대한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울기라도 하던 몽실이가 점점 말이 줄어든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권정생 작품이 줄곧 이야기하는 별이 있는 듯하다. 커갈수록 몽실이는 눈치를 보다가도 곰곰이 생각하고 가만가만 말한다.
“……그렇지 않아요. 빨갱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 거여요.”
“………”
정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이 맞죠?”
정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p. 57)
최선생한테 ‘인생의 길’이란 말을 들은 뒤, 몽실은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자기의 일만 아니라 어머니의 일도 아버지의 일도, 그리고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도 눈여겨봤다. 야학에는 부지런히 나갔다. (p. 67)
“사람을 죽이는 건 인민을 위한 게 아니야.”
(중략)
“왜? 넌 나 같은 아이도 죽일 줄 아니?”
“그래, 죽일 줄 안다.”
몽실의 눈에 파아랗게 불길이 올랐다.
“죽여봐! 어서 죽여봐!”
(중략)
“순철아아!……”
몽실의 여윈 빰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pp. 115-116)
그런 의미에서 몽실이는 일상적 인물이자 전형적 인물이다. <싸우는 아이>의 찬수처럼 적극적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형태도 아니며 따라서 부당함에 금을 가게 하는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몽실이는 팔자라는 말과 난남이를 안고 오래도록 버틴다. 그렇게 버틴 몽실이의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가 된다. 비단 몽실이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몽실이가 이름을 물은 사람들, 그렇게 구전되는 이야기 사이마다 이름 없이 남아있을 수많은 이들과 여성들을 존경한다. 김영민의 ‘침묵은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는 말처럼 나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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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라는 말이 주는 힘은 진짜 힘일까, 남의 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