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중 이정화 Jan 14. 2020

뿌리 깊은 인연

깊고 깊은 마음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더 기다리며,

계속 기다리는 촬영장.


기껏해야 3분 내에 끝나는 컷을 위해 이동하며 길거리에 버리는 시간도 많고, 도착을 해도 끊임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참 힘들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면 스텝들이 글씨가 이렇게 멋있냐고 칭찬해 주시는 그 3초에 신기하리만큼 하루가 충분히 보상되는 것 같다.    





나에게 그동안의 드라마와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물어본다면, 숨도 쉬지 않고 스물한 살 때 참여한 「뿌리 깊은 나무」를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촬영 횟수가 많은 것뿐만 아니라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간 스텝과 배우들 덕분이다.    



드라마 속 실어증에 걸린 궁녀 ‘소이’의 대필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의사표현을 필담筆談으로 했으니, 일주일에 최소 세 번 이상 촬영을 하러 갔다.

오후에 수원에서 학교를 마치고

늦은 밤 일산부터 문경새재 할 것 없이 정말 방방곡곡의 촬영장을 다녔다.    


시간에 맞게 도착하더라도 두세 시간의 기다림은 필수다.

하나의 장면이라 할지라도 여러 각도에서 찍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출연하는 장면이라면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모두 찍어야 하며, 촬영을 하다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것에 맞춰 모든 스텝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럴 때면 한쪽 구석에서 촬영할 글씨를 미리 연습하기도 하고, 필요한 다른 서예 소품들을 미리 써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간이 남으면 한쪽 구석에서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손전등 하나를 켜 두고 학교에서 하지 못한 과제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글씨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스텝들과 대기하는 다른 배우들이 신기해했다.

새벽이 깊어 온 몸에 힘이 빠져 있으면 스텝들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소품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전쟁터와 닮아있는 촬영 현장에서 나는 참 많은 배려를 받았다.



인서트 촬영은 대개 본 촬영 뒤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글씨를 쓰는 씬은 배우의 감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배우가 감정을 잃지 않도록 감독님도 발언을 조심하신다. 가장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맞춰놓고, 그 모습을 대필자가 따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평일 새벽에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날에는,

감독님께서 인서트를 먼저 찍자고 제안해 주시고 배우 분도 흔쾌히 동의해 주신 적도 많다.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추운 현장에서 스텝들은 나를 위해 핫팩을 꼭 챙겨주셨다.


어느 날은 야외 촬영이었는데, 정말 추웠다.

연출팀에서 핫팩을 하나 주셔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소품팀에서도 하나, 음향팀과 촬영팀, 의상팀과 조명팀까지 하나씩 주셔서 주머니가 용광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이 깊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함께하고 있다.

9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덕에 여전히 촬영지에서 만나고, 서로의 경조사에도 함께 하며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케이, 컷! 끝내주네.”



이 짧은 감탄사를 위해 함께 소비되었던 그들과의 수많은 시간.


우리의 삶에는 촬영과 비슷하게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들이 많다.



끝을 위해서 꼭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정말 힘들지만,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어느 순간,

그때 함께 시간을 나눈 사람들과의 마음이 자라서

나의 삶을 지탱해 줄 더 깊은 뿌리가 되어줄 것일 테니.







새 글은 매주 화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서예인 / 인중 이정화

injoongmaobi@naver.com

http://www.instagram.com/injoongmaobi


작가의 이전글 이미 알고 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