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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미누나 Apr 18. 2020

사소하거나 혹은 가장 살뜰한 기록 #5

  공간은 추억을 담는 그릇이다.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 그 시절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이 잔상처럼 지나간다. 그때의 나는 바빴지만 그 나름의 분주함이 좋았고, 그 시절의 나를 나눌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간혹 벤치에 앉아 시를 읽었으며, 동기와 함께 요새 발간된 신작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합평을 하며 작품을 신랄하게 비평하거나 서로를 토닥이던 시간이 있었으며,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학기가 시작되면 교수님들은 마치 그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이 당신 수업 하나만 듣겠거니 착각하신 듯, 엄청난 양의 과제와 시험 분량을 내주셨다. 우리는 불평을 하면서도 묵묵히 그 일을 소화했다. 서로가 있어 가능했다. 내게는 자주 함께 밤을 새우는 동료가 있었으며, 그 언니는 존경스러울 만큼 모든 일을 성실하고 성숙하게 처리해냈다. 언니는 자신이 힘들게 정리한 전공책 요약본을 아낌없이 나와 나누었고, 시험을 보기 전 나올 법한 내용을 확실히 이해했는지 내게 다시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 역시 자취방이 있었음에도 정신적으로 연약해질 시기엔 늘 언니의 방을 찾았다. 언니의 방은 따뜻하고 온화했다. 그녀는 전자 그라인더로 곱게 원두를 갈았고, 뚜껑을 열 때 풍기는 고소하고 감미로운 원두 향은 그 자체로도 큰 위안이었다. 언니는 내게 자주 따뜻한 커피나 차를 내려 주었고 때때로 집밥을 해주었다. 각자가 겪는 수고와 힘듦을 다 이해한다는 듯 다독여주던 때가 있었다. 때때로 서로의 상처와 우울감, 그리고 남들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공유하기도 했다.

  그 시기 우리는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가 다시 이 시기를 그리워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은 결국, 누구보다 낱낱이 모든 순간을 사랑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대학시절, 절대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딱 한 사람을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내겐 음악이 있었다. 작은 암실과 같은 그 공간은 간혹 낯선 곳에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내게 소속감과 안식처를 제공했다. 중앙광장 캐비닛 뒤쪽, 마치 해리포터 9와 4분의 3 승강장 같은 곳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이 곳은 찾는 이만 찾는 학교 산하 복지 단체였다.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인 우리는 서로의 존재로 수업과 수업 사이를 메웠다. 한 평 남짓한 관제실에 앉아 샌드위치, 짜장면, 햄버거 등을 나눠 먹었고, 음악에 맞춰 관제실 너머 프로젝트에 쓸 곡, 작곡가 명을 바꿔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 드뷔시의 음악을 바꿔 틀었고, 관현악, 교향곡, 독주곡, 성악곡 등 다양한 종류의 클래식을 접할 수 있었다. 가끔 CD룸을 채우기 위한 새로운 앨범을 구매하러 가거나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좋은 구성의 연주회를 보러 갈 때도 있었다. 음대가 없는 학교에서 더 많은 학우들에게 연주회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 연주가 분들을 초빙해 공연을 열기도 했다. 함께 팸플릿과 카드 뉴스를 만들고 홍보하던 시간이 있었다. 아직도 감상실 책상에는 내가 서툰 포토샵 실력으로 대강 만든 '과도한 마우스, 키보드 사용은 감상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것은 내가 그 시간에 있었음을, 우리가 함께 그것을 붙이고 뿌듯해하던 순간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감상실 후배와 함께 오거리를 걸으며 이야기했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것임을, 그리고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우리는 그 이야기를 안주삼아 짭짤한 오징어 다리처럼 뜯어먹고는 하겠지. 나아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 한자리에 모였을 때, 다시 풋풋한 대학생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겠지. 조금은 설익고 어쭙잖고 어리숙했던 그 시절이지만 생각하면 또 행복해지는, 그리운 마음이겠지. 마음 한편은 언제나 이 곳에 내어주고. 우리는 멋진 어른이 되자고 다짐하던 시간이 있었다. 공간과 함께 했던 이들이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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