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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 Jan 23. 2021

복직 준비 1탄

#전투준비 #전투화 #전투 지침서

얼추 한 달 만에 문을 연 요가원에 갔다.


원장님 : "그런데... 어째 요즘은 움츠러들어 계세요? 활기차던 회원님 어디 갔어요?"

나 : "네에?" (아! 그러고 보니 평상시에 나는 파이팅 넘치고 생기발랄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대표님 : " 이제 곧 복직하시잖아."

원장님, 나 : (동시에) "아~!"


복직의 어두운 기운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차올라 나를 푹 적시고 있었다. 테스 형 말마따나 나 자신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간 참선을 할 때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운이었다. 일 년 삼백 육십오 일 동안(하마터면 '우린 좋은 파트너야 ' 할 뻔.)의 육아휴직은 '과거'이고, 일주일 뒤 다가 올 복직은 '미래'이다. 과거와 미래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 오직 '지금' 만이 신께서 만들어 주신 시간이라 지금에 집중해야 하는데, 여전히 마음은 미래에 가 있어 지금 이 순간을 신음하며 보내고 있다. 오! 어리석은 인간의 번뇌여.ㅋㅋ 미래에 기인한 번뇌를 떨쳐버리기 힘들어 소극적이 게나마 전투준비를 했다. 번뇌를 떨쳐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렇다면 소속은 수술실이지만 관심은 딴 데가 있는 간호사의 복직 아이템을 소개해 보겠다.

1. 전투화
가장 투자를 많이 한 아이템이다. 수술실 업무 여건상 여덟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일해야 하므로 신발은 러닝화 중 쿠션이 제일 좋은 것으로 구입했다. 수술실 사람들은 대게 크록스로 신지만, 내 몸이 가장 오래 서 있는 곳이다 보니 수술실에서 제일 좋은 신발을 신기로 했다. 선택의 치트키는 인스타그램에서 러너를 검색해서 가장 많이 신는 모델로 몇 개 좁혀둔 다음 선택하는 것이다. 오래 달리는 사람들의 임상결과를 토대로 적용해보는 것이다. 수술실에서 운동화를 신는다고 하면 이상할 수도 있는데, 수술실 전용으로 신기만 하면 허용하는 분위기이다. 아무래도 크록스를 신고 물 있는 바닥에 슬라이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처음에는 탐탁해하지 않던 수선생님도 산재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신 것 같다.

<마녀 체력>을 읽고 재작년부터 달리는 기쁨에 무턱대고 뛰다가 발바닥의 아치가 무너졌다. 한동안 아파서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었을 때, 구매할 때까지 계속해서 퍼 나르는 빅데이터 광고를 보았다. 넘어가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하다가 되는데 되느데 하며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속는 셈 치고 구입했다. 나의 소비패턴은 늘 이런 식이다. 하지만 효과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니 다음 소비도 빅데이터에 넘어가고 말겠지만. 처음에 살 때 2개 살걸 후회하면서, 재구매했다. 밖에서 신는 운동화도 이제 아치패드 인솔을 끊을 수가 없어서이다. 40대가 되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멋 부림 보다는 편 부림이다. 왜 엄빠들이 교복처럼 등산복만 입으시는지, 왜 남편들은 골프웨어만 입는지. 매일 고무줄 바지만 입고 보니 알 것 같다.


2. 전투 지침서 Feild manual

육아 휴직 동안 근무하던 병원의 간판도 쳐다보기 싫었다. 어쩌다 외래에 갔을 때에는 근무 부서에 가서 인사도 할 법한데, 얼른 계산을 마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나왔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근무한 지 18년인데 마음의 정보다 병이 쌓였다. 휴일이든 퇴근 후든 24시간 중 아무 때나 울리는 on-call 전화로 몹시 지쳐있었다. call 대기 수당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새벽이든 휴가 중이든 아무 때고 깨워서 오라 하고, 새벽에 나와 아침에 퇴근해도 그날 하루 쉬면 그걸로 끝.  관리자들은 on-call 수당 받고, 야간수당 (시간당 x 0.5) 정산해서 받으면 산삼 먹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 스펀지밥처럼 활기차게 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흉부외과로 배정받고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 음료수처럼 살아왔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내가 휴직한 일 년 동안 흉부외과 간호사가 3명이나 퇴사를 했다.


휴직 동안 요가 지도자 과정(TTC : teacher training course)을 이수했다. 부캐를 키워 주캐를 내던져 버리고 싶다는 이글이글한 욕망을 가득 담고서 말이다. 시커먼 욕망이 사그라질 때 즈음 (아무래도 나는 티칭에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깨닫게 되었을 때) <요가수트라 - 고전 요가의 근본이 되는 경전, 기원전 1~4 세기경, 파탄잘리 저>의 아쉬탕가 요가 이론을 공부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스스로 깨우쳐 '붓다'가 되어 제자를 가르치던 무렵, 요가도 (예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대단히 미미하다가)이 무렵에 불교와 함께 힙하게 떠올라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기상으로나 지리상으로  오버랩되어 요가나 초기 불교나 당시 인도의 세계관과 사상을 담고 있어 비슷한 점이 많다. 발을 담글수록 재미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요가 선생님을 부캐로 키워 돈을 벌기는 글러먹었고, 주캐를 실행하는 동안 그간 배운 부캐 마인드를 장착하기로 했다. 후배들에게 '마이 뜨리 -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주기로.


복직을 2주 남겨두고, 심장 수술 교재를 만들었다. 내 취미는 인스타그램으로 남들이 공부하는 타임랩스나 공부 장비(독서대, 형광펜, 스톱워치... 등 무궁무진)를 보며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일이다. 그 여파로 그동안 여러 장비를 구비해 디스플레이만 해두었는데 직접 쓸 날이 오다니 감개가 다 무량했다. 혹자는 인스타그램에 공부 타임랩스 찍으려고 의대 가야겠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공시생 문제집 타임랩스보다 해부 그림도 깔 별로 넣고, 표도 많고, 글도 많고, 간지가 더 나는 것은 사실 ㅋㅋㅋㅋ) 밥벌이 공부하면서 지적 허영심도 가득 채우고, 마이 뜨리를 실천할 교재도 만드니 이 부캐 마인드 너무나 매력적이다.


#전투복 #전투무기 #전투식량 은 복직 준비 2탄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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