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늘바람 Jan 01. 2023

코로나 확진과 이태원 참사에 대한 고찰

확진자가 만명대를 웃돌며 소강상태이던 10월 초에 저는 코로나 확진이 되었습니다.

여름내내 엄청나게 바쁘게 일을 했지만 90%는 집에서 재택근무로 일을 하고 일주일에 한번 도서관 강의를 나가는 일 말고는 사람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9월 초에 프로그램은 끝이 났구요. 

그래서 저의 생각으로는 거의 모든 일을 마친 9월말 어느 날, 신나게 장을 본 마트에서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면 마트에서 사온 연어를 맛있게 먹고 그날 밤부터 배가 아팠기 때문이지요.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하고 소화제를 먹었는데 계속 아팠습니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났습니다. 그리고 등이 아팠습니다. 편의점에서 자가진단키트를 사서 해봤는데 결과는 양성이었습니다. 

주말이었기에 이틀을 타이레놀로 버티고, 양성이 나온 키트를 들고 보건소에 가서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약을 뭘 먹어야 하는지 검사해주신 선생님께 물어보니 약국에 가서 지금 증상들 얘기를 하고 약을 사라고 하시더라구요. 기침 콧물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부터 며칠간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직전에 장을 잔뜩 봐왔기에 배달음식은 안시켜도 괜찮은 상황이었고, 

그저 밥먹고 약먹고 자고 기침하다 깨서 밥먹고 약먹고 자고 기침하다 깨기만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멀쩡해졌습니다. 

먼저 코로나를 겪은 선배가 '일주일 격리 끝난다고 아픈 것도 끝나는건 아니니까 몸관리를 계속 잘해야한다'고 말한 것이 복선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일주일째 되는 밤 열두시 경 남은 자가진단키트로 음성이 나온것을 확인하고 일주일치 쓰레기를 들고 나와서 제일 먹고싶었던 치킨을 포장해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얼마나 낮에 나가고싶어 좀이 쑤셨던지 산책도 다니고 집 배치도 바꾸고 하며 다시 천천히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격리해제 4일째 되던 밤에 갑자기 기침이 점점 심해지고 가슴이 시린 느낌, 등이 엄청나게 아프면서 호흡곤란이 왔습니다.

밤을 새며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지만 점점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6시 반에 119에 전화를 걸어 응급실을 가고 싶은데 어디를 가면 되느냐고 물었고, 제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국립중앙의료원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구급차를 보내주겠냐고 물으셨지만 그때까지는 그나마 힘이 있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더 필요한 사람이 타야할 것 같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중앙의료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코로나 검사를 다시 하고, CT를 찍고, 엑스레이를 찍고, 피검사를 하고, 산소포화도 체크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는데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도 응급실에 있으니 마음이 안심이 되었는지 기침도 줄고 괜찮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주는 약을 받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지나고 다시 아파지기 시작해서 동네 이비인후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던데 지금도 아프다, 했더니 동네 병원에서는 우리가 해줄 정도가 아니니 다시 응급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중앙의료원에 다시 가서 일단 본관으로 갔습니다. 오늘 아침에 응급실에 다녀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혹시 외래로 지금 볼 수 있는지 물었더니 지금은 의사 선생님이 아무도 없다고 응급실로 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몇시간 전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다시 그 응급실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료기록사본을 받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금 쉬면서 상태를 보려고 했는데, 점점 상태는 악화되기만 하고 저녁 6시경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이때도 역시 더 급한 사람들이 많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어리석죠. 


거의 비틀거리며 응급실에 도착하니 PCR이 없어서 받아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침에 응급실에서는 바로 결과를 봐야 해서 신속항원진단을 했거든요. 순천향 응급실 간호사선생님은 너무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면서 119에 전화해서 다른 병원을 찾으라 했습니다. 

결국 저는 119에 다시 전화를 걸어서 지금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구급차가 와서 순천향병원 응급실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저를 찾았습니다. 

지금 상태를 이야기하고 낮에 중앙의료원에서 받아온 의료기록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구급대원님은 지금 갈 수 있는 병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또 주말이었거든요. 

이미 서울 시내에 자리가 다 찬 응급실들은 자신에게 문자로 이쪽으로 데려오지 말라고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경기도 외곽 병원 뿐이고, 거기에 가더라도 오늘 아침에 받은 검사와 비슷한 검사들만 쭉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약국에 가서 더 쎈 약을 사먹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이 코로나 후유증에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알겠다고 하고 구급차와 헤어지고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연 약국을 찾았습니다. 최대한 쎈 약으로 달라고 하고 김밥을 한줄 사서 꾸역꾸역 먹고 약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등이 칼로 베는 듯이 찢어지게 아팠고 숨은 코 끝에서만 헐떡헐떡 거리고, 열은 나지 않았지만 기침이 끝없이 났습니다. 약을 먹고 아주 잠깐 잠들었다가 (30분) 깨어났을 때는 천국에 왔나 싶었습니다.  

그때라도 나가서 다시 119를 불렀어야 했지만 그때는 정말 그럴 힘도 없어서 아침이 될 때까지 버티다가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가서 다시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지금 갈 수 있는 응급실은 중앙의료원이라고 이야기해주셔서 거기로 가달라고 하고, 산소포화도가 86%까지 떨어져서 산소마스크를 씌워주었습니다. 

그걸 쓰더라도 갑자기 숨쉬기가 확 좋아지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아주 조금씩 숨이 내려가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옆에 날 구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되니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응급실에서는 산소를 코에 끼우고 입으로는 네뷸라이저를 계속 불었습니다. 응급실 의사선생님은 입원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집에 혼자있으면 불안감에 더 아파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아무것도 챙겨온 것이 없는 상태였지만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등이 아픈 것은 진통제를 먹고 기침과 호흡곤란은 산소치료와 네뷸라이저 처방을 해주었고, 링겔을 꽂아서 저는 비타민도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코로나 격리 전에도 일이 많아서 잠을 잘 못잔 탓에, 거의 3주 가까이를 제대로 된 잠을 못잤던 터라 입원해서는 자고 네뷸라이저 하고 밥먹고 검사하고 자고 네뷸라이저 하고 밥먹고 검사하는 며칠을 보냈습니다. 피검사와 엑스레이와 담도(가래)검사와 소변검사 등등 수많은 검사를 했습니다. 


중간에 근처 사는 친구들이 와서 팬티도 사주고 마카롱도 사주고 귤도 사주고 노트와 펜도 사주고 갔습니다. 카톡 선물로도 뭔가 많은 것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입원실은 6인실이었는데 환자는 4명뿐이라서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치매환자 할머니가 계셨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가 계셨고, 외국분이 한분 계셨습니다. 

귤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말과 대체 공휴일까지 지나고 입원 4일만에 담당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그 수많은 검사 결과 딱히 이상한 점은 없고, 코로나 후유증과 약간의 비염기가 환절기를 만나 급성 발작처럼 호흡곤란이 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천식과 증세는 비슷하지만 검사 결과 천식은 아니고, 일단 천식과 같은 치료를 하면서 외래를 보자고 하고 퇴원하라고 했습니다. 

죽을 것 같이 아프던 날들이 며칠 만에 금새 괜찮아지니 내가 거짓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며칠동안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등 정신적으로 헤롱거리는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서도 처방해준 호흡기 치료를 하고 온갖 영양제를 먹으면서 3주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외래날 다시 병원에 가서 폐기능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또 정상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호흡기 치료는 몇 달을 더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3년동안 얼마나 많은 코로나 환자와 코로나 후유증 환자를 보셨을 텐데 저는 당연히 선생님 말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예전 컨디션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조금 움직이면 쓰러질 정도로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계속 움직이고 피곤해도 뭐라도 해야 빨리 돌아온다면서 운동을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낮시간에 나가 삼십분을 걷고 세시간씩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지만 끔찍했던 저의 코로나 후유증 투병 일지였습니다.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라서 이렇게 구구절절 투병 기록을 얘기한 것이 거의 처음과 같네요.   

10월 29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려고 준비하고 있던 시간,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많이 들렸습니다. 무슨일인가 싶었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가 시작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뉴스 속보가 떴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이태원에서 중앙의료원, 한양대병원, 고대병원 등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새벽까지, 아침까지, 아니 낮에도 하루 종일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급차를 탔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뉴스에서 일반 응급환자는 응급실을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보고, 저는 만약 제가 후유증으로 너무 아팠던 날이 겹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갔던 순천향 병원도 나왔고, 아마 출동했던 이태원소방서의 대원 중에는 제가 만났던 그 구급대원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1월 1일입니다. 

저는 그 사이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 했습니다. 누군가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그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에 가치평가를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낮에는 뉴스를 보지만 댓글은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저도 모르게 20대 초반의 여성들로 구성된 아이돌 노래를 듣고 있더군요. 직장생활도 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힙플이라는 곳은 가지 않기 때문에 그 나이대의 여성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무의식 중에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 연말만큼 죽음이라는 것이 가까이 있다고 느꼈던 적이 삶에서 처음입니다. 

허망함과 염세적인 기분을 조금씩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두 그러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새해에는 아무도 개죽음으로 죽지 않기를, 그래서 어떤 눈물도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화책과 나 '당신의 기억을 팔겠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