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로드, 카
얼마전 태국을 다녀왔다. 나의 첫 배낭여행지이자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로 손꼽는 ‘방콕’을 드디어 남편, 딸과 함께 찾은것이다. 방콕의 수안나품 공항에서 시작해 카오산로드, 파타야, 꼬란섬 등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하며 즐겁기도 슬프기도 한 시간을 보냈다.
수안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전 세계 여행자들의 도시 방콕 ‘카오산로드’로 이동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갔다. 이 자유분방한 도시에서 언젠간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함께 걷는 상상속의 모습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다.
카오산로드는 주요 여행지로의 ‘거점’ 역할을 하는 도시인만큼 다양한 인종의 여행객들이 넘쳐났다. 커다란 배낭을 멘 젊은 커플들, 혼자 맥주를 마시는 고독한 사람들, 지긋한 나이에 산책을 즐기는 노부부, 다양한 형태로 무리를 이룬 가족과 친구 여행객들이 이 도시를 즐기고 있다.
꿈이 현실로 이뤄지자 이것이 낭만과는 또다른 문제임을 금새 깨닫게 되었다. 거리에 ‘코끼리’ 문양이 그려진 전통 옷을 입은 배낭여행객들을 보자, 딸아이는 ‘코끼리’ 문양의 원피스로 갈아입겠노라 고집을 피웠다. 습한 거리를 뚫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족과의 시간’에 부채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노동의 목표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에는 가족으로 인한 부담을 떨쳐내기 위해 일로 파고들기도 하고, 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맞벌이 부부와 일곱살 딸로 구성된 우리 가족은 평소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오랜시간 함께 하는 시간에 익숙치 않은 탓에, 일년에 한두번 여행을 통해 낯선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 가까워지려는 시도는 항상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귀결된다. 여행이 한사람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족에겐 어떤 조직보다 특별한 ‘팀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다.
내가 꼭 다시 먹고 싶다고 설득해 온 가족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카오산로드 끝자락에 위치한 ‘쏘이나이’ 갈비국수집까지 걸어갔는데, 이미 가게가 문을 닫아 허무한적도 있었다. 아이가 수영을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면 우리 부부가 다른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남편이 마사지는 싫다며 나를 길거리에 두고 숙소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다. 여행 기간동안의 의사결정은 대체로 힘들거나 허무한 것들이었다.
다행히도 딸은 여행 내내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수영장을 떠날때마다 서운해서 엉엉 울었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이내 다시 신나게 뛰어놀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아이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었다. 마지막날 바다에서 인생 처음으로 파도를 탔을땐 “이거 정말 정말 재밌어!”라는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아이는 여행 내내 즐거웠했다. “아, 어떤게 제일 좋았는지 순위를 못메기겠어!” 사파리에서 기린에게 직접 바나나를 줄때의 희열, 수영장 높은 미끄럼틀에서 혼자 내려올때의 짜릿함, 해안선의 노을을 바라보며 두둥실 파도를 타는 즐거움에 대해 정말 새롭고 놀라워하며 여행을 즐겼다.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며 끝난다는 표현을 ‘금지어’로 명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부적응한 사람은 어른인 나와 남편이었다. 일년에 단한번 달콤한 늦잠을 자려했던 욕구의 좌절에 슬퍼하고, 하루 종일 아이와 물놀이를 하며 체력의 한계에 힘들어했다. 회사에서의 시간이 체력적인 측면에선 좀 더 인간적인 노동이라는 생각이 자꾸 스쳤다. 남편은 먼 나라까지 와서도 침대와 이불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못해 눈총을 받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은 우리 가족의 생활 습관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아침엔 꼭 커피를 마셔야 하고 점심 식사에 집중하는 나, 밤 늦게 야식을 찾고 낮잠을 필요로 하는 남편, 아침 일찍부터 놀아야 직성이 풀리는 딸이 서로의 패턴에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가족과 팀워크를 발휘하며 여행 호흡을 맞추는 일이 아직 쉽지만은 않다.
비록 힘들었다고 푸념하는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진을 정리하고 살펴보며 낄낄 거리고 있다. 이렇게 여행의 행복했던 순간만을 곱씹다보면 먼 훗날에는 우리 즐겁게 웃었던 모습만이 기억 속에 남기게 될것이다. 지난 여행들이 모두 그랬듯이 말이다.
몇번의 가족 여행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 함께하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하고 나서야, 기쁨이 조금 더 농밀하게 오래 지속되는 감정임을 말이다. 여행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은 모두 기억 속에서 지운채 내년의 여행을 또 다시 계획하고 있다. 마치 여행은 힘든 것들은 금새 잊혀지고마는 결혼 생활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