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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Feb 14. 2024

[책 리뷰] 한 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최태성 <역사의 쓸모>, <최소한의 한국사>

학창 시절에 한국사를 좋아하긴 했지만, 특별히 한국사에 깊은 자긍심을 가지거나 역사의식에 심취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Story)라는 점에서 ‘재미있다’라고 받아들였던 부분이 크다. 최근에 다시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시작으로 전면전에 돌입한 배경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지난한 앙금의 역사가 무엇이었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벌거벗은 세계사>를 시청하게 됐고 자연스레 자매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한국사>를 시청하게 된 거다. 마침 학창 시절 한국사를 선택하고 즐겁게 공부하게 된 데에 팔 할의 지분이 있는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이 강연자로 나선 프로그램이라 즐겁게 시청하게 됐다. 


<역사의 쓸모>, <최소한의 한국사> 두 권의 저서를 통해 선생님은 역사의식을 갖추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역사의식’이란 보통 '어떠한 사회현상을 역사적 관점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하고 그 변화 가운데 주체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의식'이라고 정의된다.(출처: 나무위키) 


그렇다면 개인이 역사의식을 갖춘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개인의 선택과 행동을 역사적 관점이나 시간에 흐름에 따라 파악하고, 선택의 따른 파장이 타인을 넘어서 사회에도 미칠 수 있다는 주체의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당연히 일개 소시민이 무슨 역사의식을 갖추고 내 선택이 타인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나 생각이 들겠지만,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의 쓸모> p.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정치/사회 무관심자인 나에게는 꽤나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는 마치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깊이 공감하고 때론 위로도 받지만, 개인 심리학의 궁금적 목표 지향점이 사회공동체의 ‘공동선’에 있다는 그의 이론을 (여전히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개념적인 이데아로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삶의 고비를 인생 전체에서 두고 볼 때 수많은 고비 중 하나일 뿐이고,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조금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고, 덧붙여 역사라는 관점을 이해한다면 혹 삶이 끝나더라도 후세에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정약용의 삶을 조명해 설명한다.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18년을 보내며 때론 비참하고 암담했겠으나, 한탄하거나 힘든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의 여생은 누군가에게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나 어쩌면 삶의 마지막 투쟁이었을 테지만, 역사를 인식하며 고난을 버티며 투쟁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역사의 쓸모> p.78) 또, 5.18 민주화 운동 시민군을 이끌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이라는 인물이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한국사> 중에서)


현재의 고난을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휩싸였을 때 과연 얼마나 초연하며 현생보다 후세의 평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위의 두 인물은 그저 현생의 본인이 뜻하는 옳은 일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과연 위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소시민인 나는 매 고비마다 절망감에 휩싸여 그릇된 선택들을 할까 봐 두렵다.


이런 삐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책들이 별로였다고 말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를 늘 고민하고, 옳은 선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선택들을 쌓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늘 고되고, 진지한 삶의 고민들은 늘 회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다 보니 다소 삐딱선을 타게 된 듯하다.


더불어 돈이 많거나 좋은 직업을 가져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꿈을 이룰 때 가장 큰 행복이라며 선생님은 늘 꿈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꾸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행복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다.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다고 느낄 때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역사의 쓸모> p. 214) 이것은 내가 앞서 언급한 아들러의 ‘공동선’과 일맥상통하다. 아들러는 타인에게 유용한 가치를 야기했다는 개인적 만족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다가가는 방식은 다소 다르지만.


역사의식에 입각한 내 꿈과 선택은 타인에게 ‘선’을 베풀 때 극대화된다는 주장에 내가 언젠가 적극적인 동의를 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최선의 선택이 늘 부끄럽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사회 구성이 아니라 적어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길. 소박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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