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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Jan 15. 2024

기억의 조각

클라우드를 정리하다 문득 든 생각

요즘 사진과 영상을 저장해 둔 클라우드를 정리하고 있다. 클라우드 용량이 부족해서 그렇다. 현재 주계정(네이버) MYBox에 180GB를 사용하기 위해 매달 요금을 지불하고 있고, 동시에 다른 계정으로 추가 용량 80GB(일 년 치 사용료 지불)+또 추가용량 30GB+아이클라우드에도 80GB(매달 사용료 3300원...)+현재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용량 60GB까지!! 대충 계산해도 400GB가 넘는 어마어마한 양으로 일 년에 클라우드 유지 비용만 15만 원 넘게 쓰고 있다. 이런 까닭에 클라우드에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는 중이다. 의미 없는 풍경, 음식 사진 등을 포함해서 같은 표정, 같은 구도에서 찍은 중복된 사진들이 수십 장씩 있다. (TMI, 게다가 아이폰 사진 설정값을 고용량으로 해둬서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지운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몇몇 사진을 보고 잠시 손가락이 당황했다. 헤어진 X들의 사진을 꼼꼼히 지운다고 지웠는데, 어딘가에 숨어있던 사진이 불쑥 튀어나온 거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는 사진 속 웃고 있는 그(새x)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굉장히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다. 게다가 이번에 발견한 사진은 연인이 되기 바로 직전에 술자리에 있던 나를 데리러 왔다가 내 친구가 귀엽다며 둘을 찍어준 사진인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해사하고 예뻐서 지우지 않기로 했다. 나를 향해 보였던 그 예쁜 미소 정도는 간직해도 되지 않을까.


난제다. 지난 연인과 함께 했던 사진을 남겨두는 게 맞는 걸까? 혹시 현재(혹은 미래)의 연인에게 미안해야 되는 일일까? 그가 그리운 게 아니라 젊은 시절의 나를 추억하고 싶을 뿐인데? 나 같은 경우 연인과 행복했던 그 시절 함께 있던 사진들 뿐만 아니라 사진들까지도 전부 지우는 바람에 그 계절의 내가 사라져 버렸다. 충동적이었다. 당시에 그와의 이별이 너무 아프고 그가 나온 사진을 하나하나 발라내는(?) 작업마저도 너무 힘겨워서 통으로 그와 관련된 사진첩을 전부 지워 버린 거다. 내가 사랑했던 시절과 나의 어린 추억도 함께 지워진 거 같아서 속상했다.


꼭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지만, 가끔은 사진이라도 남았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십여 년 전 클라우드를 훑어보다가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어떤 관계에 어떤 만남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안 나는 사람들도 있고, 얼굴조차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이제 겨우 삼십 대 초반인데, 불과 10년 전에 만났던 (일회성 만남이었겠지만) 사람들과의 이벤트가 기억이 나지 않다니 당황스러웠다. 하물며 사진으로 남겼어도 그들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 사진이나 기록조차 전혀 남기질 않았다면 아예 없던 일이 돼 버리는 거 아닐까. 그렇게 기억이 희미해지고, 남아있는 추억도 없다면 내 삶은 점점 옅어지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게 정답인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추억도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과 여전히 함께 있어야 더 빛난다는 거다. 추억은 나누지 않으면 잊히고 묻힐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함께 추억할 사람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면 언제든지 꺼내서 곱씹고 나누면서, 그 시절 기억의 조각들을 각자 내놓고 엉성하게 맞추다 보면 또 늘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추억들이 재생된다. (대학 시절 사진들을 보다가 친구들에게 그 시절 사진을 몇 장 보내줬다. 언제, 왜 찍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웃고 있었다. 함께 일 때 늘 즐거웠다.) 이럴 때 추억은 힘을 갖고 생명력을 얻게 되는 거 같다. 앞으로도 지금 친구들과 먼 훗날에도 함께 추억을 나눌 수 있길 바라본다. 더 바라건대, 새로운 누군가와 연을 맺게 닿게 된다면 오래 이별하지 않을 그런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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