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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Feb 19. 2024

일곱 번째 로그아웃

2024년 2월 18일_1100_2000 

2024년 2월 18일 일요일


전날(2월 17일 토)은 밤새 뒤척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해 준비하고 6시에 나와서 아침 7시 반부터 한라산 등반을 시작했다. 백록담을 오르는 코스는 아니라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도 힘들거니와 지난 2년 동안 등산을 해 본 적이 없다. (2년 전 마지막 등산도 한라산 동일한 코스였다.) 체력도 늘 자신 없다. 시작하고 한 시간 반 정도가 힘든 구간이고 겨울 산행이라 중간에 아이젠도 장착해야 했지만, 그래도 초반 구간만 벗어나면 꽤 할 만하다. 이번에 왕복한 어리목 코스는 백록담 뒤편인 윗세오름을 오르는 코스인데, 백록담을 볼 순 없어도 해발이 높아질수록 꽤 평평한 초원 구간이라 어렵지 않고, 구름을 풀어 둔 거 같은 드넓은 바다를 발 밑에 둘 수 있다. 등산을 하고 내려와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김포로 돌아왔는데, 김포에 내린 시각이 10시 반이었고, 집에 들어오니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정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간신히 씻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자기 전에 노트북 WIFI를 끄고 핸드폰도 껐다. 꿈도 꾸지 않고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일어난 시각은 오전 11시다. 부모님이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계셨는데, 나도 그 편에서 자연스럽게 티브이를 보게 된다. 새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잠시 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침대 말고는 제대로 된 나만의 공간이 없어서 부모님이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계시면, 책 읽기도 쉽지 않다. 채널은 많고,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티브이만 있으면 사실 6시간 로그아웃이 아니라, 60시간도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티브이를 보는 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건데, 아무래도 내 의지로 끌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만다. 아무튼 본가에 있는 동안에 뭘 좀 해야겠다 싶으면, 동네 카페로 슬그머니 나가버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나갈 힘조차 없었다. 어제 등산의 여파로 종이라가 너무 당기고, 내내 말썽이던 허리가 더 뻐근하게 조여 온다. 요가나 스트레칭을 할 힘도 없다.


1100-1400 (3시간 순삭) 부모님과 거실에서 티브이 시청

본가에는 부모님이 계실 때면 늘 티브이가 켜져 있는데, 주로 저녁 식사 시간이면 종편의 뉴스 채널이다. 부끄럽지만 적극적인 정치 무관심자인 나에게 그 시간이 괴롭기 그지없다. 이해할 수 없는 뉴스들이 넘쳐 난다. 왜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이야기들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지.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국에 뉴스를 보고 있자면 입맛이 떨어진다(?) 다른 채널로 돌려야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다행히 부모님 모두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배구시즌이라 배구 보면서 한 시름 돌릴 수 있다. (TMI, 페퍼저축은행은 22연패를 기록 중이다.) 토요일 식사 시간에는 <불후의 명곡>이고, 일요일은 <1박 2일>이다. 주말 오후 동안에는 다양한 채널을 오가지만, 지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당구 중계를 보고 있는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중 최악은 <동치미>라는 프로그램인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프로그램인지 기획 의도는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그럼에도 당구가 됐든 동치미가 됐든 켜져 있으면 저항 없이 (물론 동치미 보면서 욕은 하지만) 몇 시간이고 시청하게 된다. 


물론 티브이가 없다 해도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OTT 플랫폼을 통해서 챙겨 보고 있지만, 티브가 있다면 하루 종일 마냥 틀어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이사 갈 집에도 티브이를 놓지 않기로 했다. 원래 본가에 남는 티브이가 있어서 이사 갈 집에 가져다 둘 생각이었는데, 본가에서 지낸 3주 동안 오랜만에 티브이와 친하게 지낸 결과 이건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유튜브, 넷플릭스, 티빙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부모님과 집중해서 본 건 <꼬꼬무> 재방송이었는데, 평소에 챙겨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채널을 멈춰서 보게 된 게 11살에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어느 소녀의 이야기였다. 기구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어린 소녀 시절을 지나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이 된 현재의 삶까지 보여줬다. 늘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저 눈물을 흘리면 되는 건지, 누군가의 힘든 삶을 보면서 과연 위로받거나 삶의 용기를 얻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일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주로 목적 없이 무해하고 밝고 행복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1400-1540 글쓰기&일기&다이어리 쓰기

1540-1630 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2) – 드디어 한 달 만에 완독

1630-1800 낮잠…???????? 저는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요??

1800-1850 저녁식사(feat. 일박이일)

1850-2000 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한 시간 동안 140페이지는 넘게 읽었다. 평소보다 약간 빠른 페이스였다. 소설이라 장르 특성상 속독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읽기 쉬운 소설이기도 했는데, 꽤 널찍한 책갈피를 이용해 읽는 문장을 따라 짚어가면 더 집중해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읽는 구절 아래의 글들은 책갈피로 가리고 내리면서 읽는 건데, 그러면 눈으로만 문장 라인을 따라갈 때 보다 길을 잃지 않을 확률이 높고, 읽어야 하는 문장만 눈에 딱 들어오니 읽는 속도도 빨라진다. 물론 오늘 읽은 내용이 무척 흥미롭기도 했다. 아,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고 무릎을 탁 쳤다. (1Q84 이후로 가장 흥미로운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 소설이다.)



오늘은 티브이보고 낮잠 자다가 책 읽은 게 전부다. 이런 식이면 며칠이고 내내 핸드폰 없이 살 수 있을 거 같다. 어찌 됐든 전날부터 핸드폰을 꺼뒀으니 거의 20시간 만에 핸드폰을 켰는데, 수신된 카카오톡 메시지가 광고 3개뿐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지우기 힘들다. 괜스레 외롭다. 이런 감정을 느끼려고 핸드폰을 꺼둔 건 아니었는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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