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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Apr 24. 2024

[책 리뷰] 차별에 예민하고 까칠하게 반응하기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요약하기>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1장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불편함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될 때 그것은 우리의 특권일 수 있다.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 즉 그것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되기 전까지 특권임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게다가 기존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해 평등을 손실로 느낀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평등하게 여기고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임을 인식하지 못해 기울어진 공정성을 추구할 수 있기에, 우리는 자신이 차별주의자가 됐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2장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류하고 범주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단순화된 정보로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과잉 일반화한 결과 편견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에 더 집중해 확신하는 반면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고정관념을 확고히 하며, 사람을 구분하는 경계를 만든다. 그러나 이 경계는 생각보다 공고하지 않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국적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는 '우리'라고 여길지 주관적인 관념에 따른다. 경계선을 따라 같은 집단에는 친절하고 헌신하지만, 외부인에게는 매정하고 때론 잔인하기까지 한 경향이 있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의 축은 다층적으로 존재함으로 한 개인은 동시에 여러 차원의 집단에 속하게 되면서 상황에 따라 차별은 집단에 속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에 속하기도 한다. 이때 교차성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예를 들어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문제가 있다면 원인을 밝히기 쉽지 않다. 두 가지 차별 중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을지, 중첩된 것인지 혹은 제3의 형태의 차별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의 외부 시선을 그 구성원들이 내면화해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며 차별에 저항하지 않기에 사회는 지속해서 차별적 구조를 유지한다. 이런 구조적 차별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치부하거나, 혹은 이를 감수하도록 억압하는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정당한 차별로 위장되는 까닭)


4장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누군가를 비하할 때 즐거운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하성 유머는 자신과 결코 동일시하지 않는 상대 집단을 깎아내라고 내가 속한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즐거운 놀이로 여긴다. 유머라고 한 표현이 누군가에게 비하로 느끼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간극이 클 때 잔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일상의 비하성 언어와 각종 혐오 표현들이 만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문제를 사소하게 만들어 유머에 정색하고 대응하기 쉽지 않다.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음으로써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5장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의 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이 정의이기에 사회의 많은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따라 형성된 편향적 관점이 작용될 가능성이 높기에 완벽하지 않다. 보상이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 승자가 모든 기회를 독식하고 패자는 모멸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6장 쫓겨나는 사람들

상점에서 특정 집단의 입장을 거부하는 일(예시 내국인 전용, 노키즈존, 노장애인존 등)을 개인 영업장의 자유로 보장할 수 있을까. 특정 '집단'을 거부하는 이유로 해당 집단의 어떤 손님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정당화한다. 그러나 '진상' 손님이 성인 남성이라면 '성인 남성 금지' 표지판이 내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 삼고 어떤 집단은 단체로 문제 삼아진다. 개인영업이라고 해도 대중을 상대로 영업하여 얻은 이익이라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책임이 있다.


나아가 본래 다문화는 다양한 문화의 상호존중과 공존을 강조하는 사상이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특정 문화를 우위에 놓는 전제하에 '다문화'가 '진짜' 한국인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7장 "내 눈에는 안 보였으면 좋겠어"

거리와 같은 공공의 장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서 남성 두 명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여성이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을 때, 지저분한 행색의 사람이 지날 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간다. 거리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제가 있어 사실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성소자들의 퀴어 축제와 커밍아웃 행위에 "왜 굳이 축제를 하고 커밍하웃하는가?"라고 묻는 건 그들에게 사적 영역에 머물고 공공의 장소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있으라는 요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축제와 커밍아웃은 평등한 세계로 입장하고자 하는 욕구의 행위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그들을 향해 혐오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8장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공공질서나 안전보장이란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게 여기질 수 있다. 그러나 늘 법이 옳지는 않다. 유신시대의 헌법과 긴급조치는 만능 논리로 인권을 제한하고 권력자의 뜻에 따라 통치를 용이하게 했다. 나아가 동선동본 금혼규정과 호주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헌법의 질서는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 정신 등에 따라 폐기되고 수정될 수 있어야 하며,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행되어야 한다.


9장 모두를 위한 평등

보편적이면서도 다양한 모든 사람들의 포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을 넘어서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해야 한다. 보편성이 때론 차별을 은폐하는 억압의 기제로도 사용될 수 있기에 소수자들은 차이를 강조하며 실질적 평등을 쟁취하려 한다. 그러나 차이를 강조할수록 차별이 고착되는 '차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까. 간혹 차이가 집단 주류의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내포하지만 차이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다. 


평등의 가치를 위한 새로운 질서에는 법과 제도에 관한 논의도 필요하다. 인류는 공동체의 운영규칙을 만들고 집행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하는 제도를 구축해 왔다. 우리는 동료 시민의 존엄과 평등을 해치는 폭력과 차별에 단호하게 거부하며, 지위에 관계없이 정의의 편에서 소수자에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결국 우리 모두가 소수자이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정신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10장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차별금지법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과 차별금지에 관한 권리, 국제인권법의 원칙이 실현되도록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법률로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크게 두 가지 접근이 있는데 하나는 국가가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차별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접근이다. 그러나 차별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으며, 같은 행위라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기에 법 규정에 한계가 있다. 또 현재 차별금지법이 좌절된 실직적 이유는 일각에서 차별철폐라는 목적 자체를 부정하며 차별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그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단순히 이해관계나 다수결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단 간의 합의가 아니라 인권과 정의의 원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이 책은 노키즈존, 퀴어페스티벌 반대집회,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 등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갈등에 관한 담론을 제시했다. 내가 그 많은 담론들에 관해 여전히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담론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다시 한번 명확하게 짚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조금 열기가 옅어진 화두인 노키즈존에 관해서 누군가가 내게 의견을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노키즈존을 찬성하는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키즈존을 명시하고, 그에 따른 이유로 해당 영업장 구조상 장애물이 많아 아이들의 안전을 이유로 노키즈존을 설정했다는 글도 봤다. 게다가 (차별과 다소 무관해 보이지만) 카페에서 노트북 사용에 제한을 두거나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을 제한하는 경우도 봤다. 어떤 영업장은 혼술식당이라는 콘셉트 유지를 위해 1인 혹은 2인 단위로만 손님을 골라 받는다. 이처럼 개인 영업장에서 점주가 어떤 대상에게 서비스를 제공할지 선택하는 것은 자유라는 입장도 일부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추가로 든 예시들과 노키즈존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건 차별이란 주제하에 무리인 걸까. 


어쨌든 다시 노키즈존/노장애인존이라는 제시된 담론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 동반에 따른 다른 손님들의 컴플레인이 많아서 혹은 휠체어로 접근이 제한되는 공간이라는 이유에서 그들의 입장이 거부되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차별이라는 입장이 굳어지게 됐다. 수많은 컴플레인 중에 '아이를 동반'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특정하기 쉬운 타깃이 되기 때문에 차별이다. 또, 휠체어로 접근이 불가능한 공간이라는 거 자체가 이미 차별이다. 그들은 아이를 동반하지 않아도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아도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차별의 공간이 맞다.


내가 반년을 아르헨티나에서 지냈을 때 놀라웠던 점 중에 하나가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었는데, 얕은 시각으로 이 나라에는 장애인 비율이 높은가 보다 했다. 그 말은 들은 친구가 장애인 비율이 높은 게 아니라 장애인들이 많이 다닐 수 있는 환경인 거 아닐까?라는 질문에 살짝 얼어붙었다. 아르헨티나가 장애인들에게 편리한 시설을 한국보다 더 잘 갖췄는지에 대해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그들이 훨씬 자유로운 건 맞는 거 같다. 춤추러 간 클럽에서 스테이지 한복판에도 휠체어를 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선 공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휠체어를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았고, 그도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한국에서 휠체어를 타고 클럽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되지 않는다.


또 성소수자들이 광장에 나서는 것과 그들에 맞서는 것을 동일 선상에 둘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소수자들은 이성애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피켓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그들에게 혐오의 표현을 던질 수 있다면 특권이다. 그리고 그 특권을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며, 그것이야 말로 평등의 가치에 위배되는 해악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불가피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지 말라는 요구는 그들에게 공평하게 허락된 공공의 공간에 보이지 않은 존재로서 계속 있으라는 압박이라는 의견에 나 또한 그들을 다소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됐다.


역시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어쩌다 게이 클럽인 줄 모르고 잘못 들어간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동양인 여자애가 게이클럽에는 어째서 왔을까 하는 의아함의 눈빛이었는데, 거기서는 내가 성소수자였고 이성애자였기 때문에 받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타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시선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지 나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느낄 수 있었다. 또, 게이 클럽이라는 특수한 공간 이외에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수많은 게이 커플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광장에 나와 있어도 그들을 향해 혐오의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누군가는 그들 존재를 싫어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표현(시선을 포함한다)'을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거 자체가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이 향하지 않는다는 걸 내 시선 속에 포착했다. 내 놀라워하는 시선이 그들에게 불쾌하지 않았길 바라며 슬며시 내 시선을 걷어냈는데, 나중에는 의식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책은 이렇게 나도 모르게 차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 이미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줬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새로운 갈등들이 발생하겠지만, 사회가 어떤 정의를 바탕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평등'과 '자유'에 대한 정의에는 합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몇몇 주제에 관해서는 그 갈등의 정도가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례로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해 그들의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사회의 그림자를 조명하기도 하고, 하트 시그널과 같은 연애 프로에서 연인을 찾는 모습도 보여준다. 여전히 누군가는 비난하고 혐오의 표현을 하겠지만, 그런 프로들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광장에 한 발 내딛게 된 거라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차별 이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차별을 암묵적으로 무시하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묵인해 왔음을 시인해야 하는데서부터 차별의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차별할 의도가 없었을 표현이라도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있는 발언이라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론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소한 일상 언어 몇 가지를 고치거나 삭제했다. 그중 한 예로 웬만하면 타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지만, 간혹 교제 여부를 묻게 될 때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 있으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디폴트값을 이성애자로 설정한 질문이었다. 대신 성을 지우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만나는 사람 있어요?"라고 묻는다. 사소하지만 내 나름대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첫 단계다. 까칠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기,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차별과 억압이 일상에서 무의석이고 비의도적인 습관, 농담, 감정, 용어 사용, 고정관념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리스 영의 말처럼, 무작정 사람들을 비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한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p. 189)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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