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기와 두 개의 언어

어학연수가 별거 있나?

by 한지애

파견 가기 전 면접 날. 가장 두려운 것은 영어면접이었다.

그 날 느낀 수치를 잊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룹 면접이어서 나와 같은 지원자들 4,5명과 심사 위원 4명 앞에서 말을 했다. 사실은 내가 합격을 못 했다면 난 전적으로 내 영어를 탓할 셈이었다. 그래서 난 당당하게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지금 내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원하면 도전을 해봐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말라위에 가면 영어를 써야 하고, 심지어 마을에서 살려면 현지어도 배워야 한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말라위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매우 알아듣기가 쉬웠다. 악센트 때문에 발음을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사람들의 말하기 속도는 나에게 알맞았다. 나도 천천히 대답할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말을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 대신 이 방식은 말라위 사람들과만 통했다. 가끔 외국 봉사자들과 만날 때면 그들의 빠른 말하기 속도와 생전 들어보지 못한 표현법과 단어들을 들으며 한 번씩 풀이 죽곤 했다.


나는 한국식으로 사고하고 한국식으로 직역하여 말하다가 상대를 혼동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가다’와 ‘오다’였다.

우리말로 누가 부르면 우리는, ‘응 갈게!’ 이렇게 대답하니까, 마을 친구에게 ‘okay, I go!’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다시 나에게 ‘where do you go (어디가)?’라고 물었다. 나는 ‘to you! I go (너한테 말이야! 내가 간다고)!’라고 했더니, 친구가 나에게 그럴 때는 ‘come (오다)’이라고 말해야 하며, '곧 갈게'는 ‘i am coming’이라고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여기 말라위 현지어도 영어식 표현과 같았다.

현지어로 '나 간다'는 'ndiku pita'인데, 'pita'는 '가다'라는 동사이다.

그리고 '곧 갈게 (너에게로)'는 'ndiku bwera'라고 하고, 'bwera'는 ‘오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어학연수를 큰돈을 드려서 해외에서 하는 이유는 좋든 싫든 한국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러 선택하는 나라도 아니고, 돈을 주고 간 것도 아니지만 현지에서 쓰는 언어를 배워야 하다 보니 매일같이 노력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새로운 단어도 쓰고, 새로운 주제로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미미하게라도 조금씩 언어가 늘었다.


매일 일 끝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를 영어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마을 자치 공부방 사업과 관련된 유엔 보고서를 자주 읽었다. 거기서 내가 운영위원회 회의에서나 공부방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써먹을 수 있는 단어들이 많았다. 말하기 연습은 외장하드에 미리 담아 놓은 테드 Ted 강연 영상들을 보고 소리 내어 따라 읽고, 발표자가 한 문장을 끝내면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것을 저녁 시간이나 주말을 통해 꾸준히 공부했다.


선생님도 없고, 시험 대비로 하는 공부가 아니기에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 발전이 있긴 한지 종종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의문은 완벽한 원어민과 나의 실력을 비교하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비교 대상을 어제의 나, 한 달 전의 나, 말라위를 오기 전의 나와 비교했다. 오늘이 그래도 제일 발전한 모습이었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이 많다. 하지만 마을로 들어갈수록 영어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수도나 대도시에서는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도에서도 한 시간 떨어진 외각 지역만 해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덕분에 나는 말라위에서 지낸 시간에 비해서 빨리 현지어를 배웠다. 마을에서 나와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던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몇몇 공부방 교사들이 다였다. 한 시간 거리를 산골 마을에서 공부방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마을 사람들과는 99% 현지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현지어를 늘리는 데 있어서 내게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스마트폰 녹음기 앱이었다. 촌장님들과 정기 미팅을 할 때마다 폰으로 회의 전체를 녹음해두었다가, 나의 현지어 선생님이자 친구였던 파니에게 한 문장씩 다시 반복해 들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이 방법으로 나의 현지어와 영어 두 언어 다 발전할 수 있었다.


말라위 수도에서 한 번씩 다른 활동가들과 말라위 유네스코 직원분들과 정기 미팅을 가질 때도 나중에 나는 말라위 현지어로 발표를 하였다. 비록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은 힘들지만, 마을에서 교육 사업을 하면서 현지어를 두고 영어를 쓰는 게 당연하다는 관행을 따라가기 싫었다. 어디를 가든, 아무리 부족한 실력이라도 현지 사람들은 외국인이 자기의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만으로 큰 감동을 받는다.


상대를 알아가려는 마음이 크다 보니 그를 위한 수단으로써 언어를 배우는 게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타적인 또는 관계 중심적인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 자연스레 나의 언어 능력도 (심지어 두 개의 언어를) 향상해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언어가 어렵고 배우기 싫어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나아가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우 중요하고 감사한 도구라는 것을 말라위에서 온 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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