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여행이 남기는 것들
작심삼일 이랬던가. 퇴사 3일 차인 오늘, 오늘은 정말 글이 써지지 않고 몸도 축축 쳐진다. 그래도 퇴사 후 1일 1 브런치와, 1일 1 운동을 하겠단 결심을 했기에 꾸역꾸역 타자를 치고 있다. 브런치는 어찌어찌 켰는데, 이따 운동을 갈 수 있을까? 뭐든 무리하면 안 되는 법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첫날 러닝머신에서 너무 무리한 탓에 삼일 만에 무릎 뒤가 너무 아파 걸을 수가 없다. 헬스장을 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처음엔 퇴사 후 출근대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헬스장을 끊은 건데 가만 생각해 보니 2주 뒤 여행을 위한 체력 단련이란 생각이 든다. 2주 뒤 나는 파리로 한달살이를 떠난다.
일을 그만두거나 퇴사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난다. 2019년 9월쯤, 햇수로 5년여 오래 일한 팀을 그만두고 나도 여행을 떠났었다. 동유럽을 10박 12일 동안 일주하는 패키지여행 상품이었는데, 그 여행을 떠날 때도 정말 고민이 많았다. 여행을 갔다 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게다가 내 나이에 자유 여행을 가야지, 패키지여행을 가도 될까? 그런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서른이 됐던 찰나라, 내 나이에 패키지로 여행을 간다는 것부터 다들 의아해했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짤 에너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어떻게 10박 12일간의 코스를 짜고 묵을 곳을 찾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여행지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옮겨다닌단 말인가. 선택의 연속인 여행일정을 짜기엔 그 당시 나에게 무엇을 결정할 에너지는 하나도 남지 않았었다. 그런 생각에 패키지여행을 끊었지만, 패키지여행을 가는 게 과연 옳을까? 250만 원이란 여행 상품을 결제해 내가 10박 12일간 얻어 올 수 있는 건 대체 뭘까, 굉장히 의심스러웠다. 인스타에 올릴 몇 장의 사진들? 약간의 기분전환? 그것만 빼면 통장잔고를 비우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결론 적으로, 10박 12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남는 건 내 예상과 비슷했다. 즐거운 여행의 끝, 인천공항에 돌아오자마자는 여행의 즐거움, 추억 같은 건 순식간에 증발됐다. 모든 건 리셋되어 다시 아등바등한 현실로 돌아왔다. 바로 다시 일을 구했고, 다시 현실 생활인이 되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그 여행이 분명 내게 남긴 것들이 있었다. 예상외로 좋았던 크로아티아의 성벽투어, 뜨거운 햇볕과 이국적인 바닷가 풍경, 국경을 넘어가는 패키지여행버스 안에서 가이드님이 틀어줬던 노래, 영화에 나올법한 허름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신 코코아 한 잔, 어느 유명 영화감독이 사랑했다던 일몰, 잠만 자러 들렀던 보스니아 호텔의 아침 풍경, 오스트리아의 드넓은 초원, 사운드오브뮤직의 광팬으로 밟아본 분수대는 감격스러웠고 식사를 마치고 혼자 거닐었던 유럽 어느 동네 어귀의 한적함, 그런 것들이 내 삶에 남았다.
또 고민 끝에 선택한 패키지여행도 만족스러웠기에 내 선택에 대한 믿음도 얻을 수 있었다. 최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당시 나와 같은 이유로 패키지여행을 많이 선택한단 기사를 봤었다. 2019년 그 당시에 유튜브 영상을 찍어 후기를 남겼더라면 나름 조회수가 잘 나왔을 거란 기록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만큼 패키지여행이 만족스러웠다. 운 좋게 좋은 가이드와 일행들을 만난 덕분인데 그 운이 좋음에 감사했고 '난 운이 좋아'라는 믿음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여행 중 얻은 몇몇 좌절과 실패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이 크다면 좋은 기억으로 덮인다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더 쉽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2주 뒤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 티켓은 156만 원. 파리에서의 한달살이가 시작된다.
물론 백수가 되고 나니 심적으로 밀려드는 돈에 대한 압박감도 존재하지만 그걸 모른 척할 수 있는 것도 이전의 경험이 있어 가능하단 생각을 해본다. 물론 단순 여행이 아닌 한달살이를 결심할 수 있었던 건 동생 덕분이다. 동생은 벌써 4년째 파리에서 혼자 살아내고 있는데, 동생 집에서 신세를 질 생각이다.
이 여행계획 덕분에, 퇴사 3일 만에 구인사이트를 들여다보다가도 '우선 여행 갔다 와서'라는 생각에 끄게 되고, 강제 휴식을 취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이번 여행에선, 난 무엇을 얻게 될까?
남편도 여름휴가를 이용해 일주일가량은 같이 떠날 것이기에 1년 만에 다시 가는 두 번째 신혼여행이 될 것 같고, 신혼부부 1년 만에 약 3주가량 떨어져 있게 되는 다소 드문 경험을 하게 될 것 같고, 파리에서 동생과 2,3주가량을 같이 지내며 꽤나 싸우게 될 것도 같고, 마지막 일주일은 엄마 아빠도 날아와 우리 가족 넷이 파리에서 함께 있어보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래 이거면 됐다. 더 이상 무엇을 얻게 될지, 잃게 될지는 계산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