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Fondazione Arena Di Verona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퇴근길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매장에 들러 늘 한 봉지를 사 와 쟁여놓는다. T커피 프랜차이즈에서 곡성 멜론 스무디를 출시했더랬다. 궁금해서 먹어봤는데, 어라? 메로나를 녹인 맛이었다. 값은 메로나 한 봉지. 그래서일까? 부담 없이 언제 까먹어도 맛 좋은 메로나를 애정한다. 글을 쓰는 지금도 입에 물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에는 베로나라는 도시가 있다. 메로나와 비슷한 발음의 도시다.
Verona 베.로.나.
스타카토 식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면 예쁘게 들린다. 베네치아에서 서쪽으로 운전하면 두 시간이 안걸려 도착한다. 베로나는 작은 도시다.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하루면 충분하다. 관광객들에겐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로 유명하다.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사랑을 고백받았다는 골목집이 있다. 이름도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이다. 2층 줄리엣의 테라스는 늘 관광객으로 만원이다. 단체 관광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입장료를 내고 기어코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줄리엣이 그곳에 살았던 것으로 믿고 말이다. 그러곤 2층 테라스에 올라 아래의 로미오에게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사진을 남긴다.
그러나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 아니다. 세익스피어 희곡의 가상의 무대가 베로나일 뿐인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베로나에 가봤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데 왜 영국 작가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삼았을까? 바로 "루이지 다 포르타"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세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원작의 무대가 베로나였다.
그래도 “올리비아 핫세”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은 베로나에서 찍은 것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아니다. 로마에서 촬영했다.유명한 발코니 장면은 아르테나(Artena)라는 마을의 “팔라치오 보르게세” 정원의 뒷마당이 촬영지다. 아래는 1968년 작으로 그 발코니 장면이다.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했다.
물론 줄리엣의 집에 가더라도 장삿속에 당했다고 혀를 찰 필요까지는 없겠다.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가 세상에 없다고 두 사람의 사랑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행은 낭만이 없으면 안된다. 줄리엣의 집에 온 관광객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그들의 사랑이 탄생하는 그 순간을 상상하면서,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제각기 설레이기 때문이 아닐까?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더라도 한 방이 있는 곳이다. 내 버킷 리스트의 한 곳이었으니까. 베로나 시내 한가운데에는 "아레나 디 베로나 (Arena di Verona)"가 있다. 이곳은 로마의 유명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의 베로나 버전이다. 여름이 되면 매년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린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몇년 전 이태리로 가족여행을 한 달간 떠났다. 베로나를 꼭 가야만 했다. 가족들 모르게 티켓을 한 장 예약했다.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 아이다(AIDA) 표를 산 것이다. 네 식구 표를 살 여유는 없었다. 장당 150유로가 넘었으니까. 핑계가 있기도 했다. 시작 시간은 저녁 8시다. 자정까지 아이들이 잠자코 오페라를 감상할리가 없기도 했다.
아레나 디 베로나 앞은 스위스, 독일 등 인접 국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하러 줄을 서 있었는데, 단체로 온 이들이 많아 보였다. 다들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그날은 그해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작이 공연되는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베르디의 아이다가 오르는 것이다.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의 오페라 공연은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무대연출로 유명하다. 오페라 아이다의 무대는 아프리카다.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군 사령관인 라다메스의 사랑 이야기다. 이국적인 장면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오페라 아이다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아리아들이 많다. 아래의 '개선 행진곡'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베로나에서의 오페라 감상은 경기장 위로 올라가 벽돌 의자 위에 앉아서 보는 게 제격이라는 경험담도 봤다. 한낮 내내 작열하는 태양열로 달궈진 벽돌의자가 서서히 식어가는 저녁 무렵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아레나의 오렌지 빛 석양풍경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돈을 더 내더라도 잘 보이는 곳에 앉기로 했다. 한참 전 예매를 한터라 1층 중간의 괜찮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니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지웠다는 기쁨이 차올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력이 급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운전과 한낮 도보 관광으로 지쳤나 보다. 밤 12시가 넘어서도 이어지는 공연에 어느 순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열 몇시간을 날아가 뉴욕에 도착한 첫날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를 보러 갔다가 한숨 푹 자고 나온 기억이 떠올랐다. 본전 생각을 하며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메로나 한 봉지를 더 까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중간에 메로나 타임이 있었다면 졸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PS. 브런치스토리의 내 프로필 사진은 당시 베로나 시뇨리 광장에서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