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그렇지' 하며 공감했던 대사가 있다.
어떤 한 학생에게만 특별 지도를 하는 코치에게 왜 그 아이만 지도하는지 조심스럽게 학생이 묻는다. 코치는 정말 허를 찌르는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을 한다.
"유림아, 있잖아. 학생이 지도를 요청하면 그 요청에 응하는 것이 코치로서 의무다. 그리고 나한테는 참 기쁨이고.. 근데! "선생님, 1시간만 더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 팡세 자세 괜찮아요?" 이거 물어보는 거 쉽거든. 아~들이 쪽팔려서 그러나? 그런 말 하는 아~들이 아무도 없다. 아무도!"
도움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쉬운 것을 하지 못한다. 부탁한다는 것은 내가 그 일에 자신이 없거나 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해 달라고 해야 하는 일이다. 부탁하면 자신이 뭔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완벽주의자들은 더더욱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책 잡힐 일은 하고 싶지도 않고 무시당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 삶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고 시스템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모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년 전만 해도 비대면 사회로 시스템을 전환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지금의 비대면 환경이 구축되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자.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고 그 이후는 앎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 테니까.
간단히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돼서 햄버거 체인점에 들어갔다. 마침 들어간 곳은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한산했다. 아르바이트생도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방문한 곳이라서 주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리번거리는데도 아르바이트생들은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키오스크를 막무가내로 눌러가며 겨우 주문을 마쳤다. 도움을 요청할까 하다가 그냥 내가 하지 뭐 하는 오기로 기어코 주문을 성공시켰다. 키오스크 그게 뭐라고 이렇게 애를 먹이는지... 그리고 그걸 성공했다며 혼자 뿌듯해하고 좋아하다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문이 성공해서 좋았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었더라면 다 빨리 기분 좋게 음식을 먹었을 것 같다.
어렵게 주문한 음식이 나와 먹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패스트푸드점은 이제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패스트푸드점에 오셨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의 노파심이 그분들을 주시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키오스크 버튼 앞에서 손가락들이 방황을 하고 있다. 도와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르바이트생이 있으니까 도와주겠지'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누구도 '도와주겠다'고도 '도와 달라'고도하지 않는다.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고, 할아버지는 키오스크 앞에서 절대로 도와 달라고 하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다. 결국 한참을 키오스크에서 씨름을 한 후 할아버지께서 햄버거를 주문하셨다. 주문을 성공하시는 걸 보니 전에도 한번 사용해보신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갑자기 손님도 없는 매장에 아르바이트생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뭔가 싶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아보니 쟁반에 음식이 놓여 있고 짜증스러운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소리로 말해도 다 들릴 정도의 공간인데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한 아르바이트생의 의도는 음식이 나왔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왜 가지러 오시지 않냐는 뜻의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불편한 신호였다. 할아버지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시는 듯 계속 자리에 앉아 계셨다. 이상함을 느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툭 치며 카운터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때가 돼서야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민망하신 듯 "나는 가져다주는 줄 알았지"하시며 허허 헛웃음을 지으셨다. 그리고 민망하신 듯 미안하다고 사과하신 후 햄버거를 들고 오셨다.
순간 욱~ 하는 것이 올라와 아르바이트생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내가 사장님도 아니고... 여기서 내가 꼰대질을 할 필요는 없기에 살짝 불손했던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오히려 더 친절한 목소리로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가 당한 일인데 내가 당한 것처럼 속상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거나 친절한 눈빛으로 대한다면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따뜻함과 친절함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시대가 점점 빨라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전환이 빨라지는 이 시대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노력과 새로운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2020년 이후에는 다방면에서 디지털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디지털 시스템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없어도 지금껏 살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꼭 배워야 한다는 필요를 못 느낀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바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쩔 수 없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QR코드’, ‘키오스크’는 스마트 기술과 기기가 도입되면서 이미 우리 생활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디지털 기술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에 취약한 계층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도 그 기술의 편리함을 누리지도 못한다. 점점 디지털 양극화가 커지고 있다. 이를 인지한 정부와 기술자들은 끊임없이 디지털 정보 격차를 줄이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개인이 혼자 이것을 배워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때는 두렵기도 하다. 이럴 때 인간을 향한 따땃한 기술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앞으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 나타날 것이다. 그때 함께 배우면서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