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하노이 여행기
눈앞이 캄캄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지난 번 여행 때 화를 내며 했던 말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쩌자고 이번 여행에 따라 나섰는지 내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맥이 탁 풀렸다.
그때 뭔가 익숙한 형체가 앞쪽에서 움직였다. 꾸부정하게 움츠린 채 연신 위아래로 고개짓을 하며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덩치가 산만한 아저씨가 실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꿈꾸는 듯했다. 남동생이었다.
“뭐야?... 탔어? "
"어.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러더니 내 이름을 부르잖아. 구세주가 나타나는 줄 알았어. 그래서 휴지가 없어서 그러는데 휴지 좀 달라고 했지."
남동생은 그게 무슨 영웅담이라도 되는 듯 연실 킥킥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여자 분이 주신 휴지로 일 처리하고 나왔더니... 직원이라고 하면서 빨리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때 무슨 천사를 만난 줄 알았어. 직원이 친절하게 나를 탑승구로 안내하고 돌아서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더라고... 진짜 예쁘더라.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탔는데 바로 탑승구가 닫히던데."
나는 정말 어이가 없는 데다가 남동생이 타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순간의 캄캄함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폭발해 버렸다.
"야! 이 미친놈아! 화장지를 가지고 다녀야지. 미치겠다. 너 때문에 다들 기다렸잖아. 못 살아. 내가 제명에 못 살고 죽겠다. 진짜 왜 그래?”
남동생이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안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앙칼진 목소리로 동생들을 향해 미친 듯이 쏘아 붙였다. 동생들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나는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남동생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누가 요즘 휴지를 가지고 다녀? 우리나라 화장실이 얼마나 깨끗하고 휴지가 잘 비치되어 있는데...."
조금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변명을 하는 남동생이 순간 미련곰탱이처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부글부글 끊었던 분노에 이제 여행지로 갈 수 있겠다는 안도감, 그리고 사람 속을 뒤집는 남동생의 능구렁이 같은 해맑음을 똘똘 뭉쳐 뜨거운 손바닥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악들을 응징이라도 하려는 듯 세게 내리쳤다. 내 손이 남동생의 등짝과 부딪치면서 ‘짝~’ 소리가 났다.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맑고 높은 소리였다.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동생들은 조금 전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행의 설렘을 맘껏 드러냈다. 아침도 못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지 않냐면서 서로 챙겨주는 동생들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째려봤다.
기내식으로 나오는 모든 것을 받아먹고서는 동생들은 하나둘 잠이 들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잠든 동생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보통 저 나이가 되면 다들 사회적 체면 때문이라도 가면을 쓸 텐데 왜 이렇게 하는 짓마다 바보 같은지 잘 모르겠다. 내 눈에만 저렇게 바보 같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바보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못 배운 것도 아니고 직업이 변변찮은 것도 아닌데. 나는 그깟 휴지 때문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무슨 한편의 코미디를 본 것처럼 웃겼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 고개를 돌렸는데 항공사의 로고가 찍힌 냅킨이 보였다.
나는 자기의 감정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앙칼지게 쏟아내게 한 휴지를 한껏 노려봤다. 오늘의 이 민망함과 미안함은 다 휴지 때문이라는 같잖은 이유를 대며 냅킨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남동생의 작은 가방에 몰래 넣었다. 여행 다니는 동안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게 뭐라고 다 큰 어른을 잡았는지 미안한 마음으로. 물티슈도 덤으로 챙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