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하노이 여행기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다시는 같이 여행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다짐을 했건만 또 동생들과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곳으로 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의 오랜 추억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곳이다. 사실 그곳에 관심을 보이는 동생들과 같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왕 가게 된다면 가족들에게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좋아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꿈꾸듯 그리워하던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가장 궁금했기 때문에 동생들과 상관없이 가고 싶었다. 20년 만에 다시 가보는 그곳이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를 기대하며 떠나왔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곳에 가기도 전에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도 설렘도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정신 차릴래? 내가 이렇게 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 왜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정신없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왜 그러는 건데… 왜?”
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씩씩거리며 남동생에게 쏘아붙였다. 불만이 가득 차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동생들은 민망한 듯 내 비위를 맞추느라 온갖 어울리지도 않는 아양을 떨었다.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번에도 남동생이 계속 뭉그적거리다가 비행기를 못 탈 뻔한 적 있다. 그때도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동생들에게 분을 다 풀어냈다. 그리고는 선언했다.
“내가 다시 너희들과 여행을 가나 봐라. 만약에 내가 너희들이랑 또 같이 여행을 가면 나는 미친년이야.”
물론 나는 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동생들은 바로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이 상황을 은근슬쩍 넘기는 느물느물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또 이들과 함께 뭔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겉만 보만 내가 아주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어쩌면 급하고 마음 약한 내가 동생들에게 늘 당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화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역시나 잔소리를 해야 움직이는 남동생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재촉할 때마다 늘 같은 레퍼토리로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둥, 아직은 괜찮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면 나는 또 그것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잔소리 폭격을 받은 남동생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알겠다면서 움직였다. 그리고 뭘 그런 걸 가지고 짜증을 내냐며 두툼하고 뭉뚝한 곰 발바닥 같은 큰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해줬다.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나는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내가 폭발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고 말았다. 오늘은 화장실 휴지 때문에 사단이 났다.
솔직히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 데다가 밀린 일을 처리하고 오느라 너무 피곤했다. 빨리 탑승해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지 남동생의 행동이 나의 신경을 하나하나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남동생이 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기야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 생겼다.
“뭐? 지금? 미쳤어?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잖아. 지금 가면 어떡해?”
남동생은 이상하게 어디를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 오면 꼭 화장실에 가는 버릇이 있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화장실에 가야 한다면서 뛰어갔다. 그런 남동생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러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탑승구 앞에서 초초하게 기다리다가 더는 안 될 것 같아 20통이 넘는 카톡으로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성격이 급하고 남의 시선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에게 이런 돌발행동이나 민폐를 끼치는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피하고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풀가동해서 대처방안을 찾고 있는데 남동생이 보낸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카톡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 오늘 안 되겠어. 배가 너무 아픈데... 아직 해결이 안 됐어. 근데 더 큰 문제는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 누구 없냐고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어. 아.... 나 비행기 못 탈 것 같아. 그냥 혜미랑 둘이서 가. 나는 그냥 집에 갈게.”
정말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코앞에서 비행기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탑승구 앞에 마지막 승객을 찾는 직원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탑승 마감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할 수 없이 여동생과 먼저 탑승했다. 설마 이렇게 하다가 여동생과 둘이서만 여행을 가게 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남동생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이제 곧 비행기 출입구를 닫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이고 미친놈...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비행기를 놓쳐? 미쳤다... 정말...”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났다. 출국심사 마치고 게이트로 가는 길에 여권이며 바우처, 그리고 여행경비마저 남동생에게 다 맡긴 일이 기억났다.
오 마이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