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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공작새 Jul 07. 2020

이야기 울렁증

지극히 사적인 소설쓰기의 역사

  최근에야 처음으로 웹소설을 읽었다. 지금까진 내심 무시하고 있던 웹소설이었다.

  근데 웬 걸? 충격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문체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니. 반발심이 들었다. 글이라면 나도 한 끗발 하는데 이정도라고 못 쓸까. 그래서 거의 2년만에 소설을 다시 써보려했다. 그러자 잊고 있던 이야기 울렁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소설을 좋아하고, 쓰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도지는 그 울렁증.  결국, 소설은 한 페이지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막혀버렸다.


  이야기를 좋아한 것은 아주 옛날부터였다. 어릴 적부터 동화책이란 동화책은 가리지 않고 읽었고, 당연 TV에서 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도 다른 또래에 비해 더 많이 본 편이다. 이야기 속에선 내가 겪지 못한 경험,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대신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이야기 사랑은 계속 됐다. 집에서 만화를 본다면 학교에선 소설책을 손에 달고 살았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가 끝나고 집에 걸어올 때 소설을 읽으며 걸어왔을 정도였다. 텍스트, 그림, 애니메이션,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보았다.  

  

  자연히 '나도 이야기를 쓰고 싶다'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판타지였다. 한창 해리포터가 유행할 즈음이었던가, 그때는 마법학교와 배틀물을 섞어 설정을 구상했다. 되도 않는 그림으로 A4용지에 나름 콘티를 그렸다. 하지만 장면 장면을 그리는 건 쉬워도 장면과 장면들을 엮어 이야기로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그려나가 보려 했지만 결국 어린 아이 특유의 실증에 금방 질려 그만 두었다.


  중학교, 중2병으로 온갖 상상을 다하던 시절. 이때는 룬의 아이들과 반지의 제왕, 그리고 이런 저런 만화들의 영향을 받아 다시 머릿속에 장황한 판타지 대서사시를 그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때 '설정놀음'이라는 매우 안 좋은 놀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상상 속 캐릭터들을 구체화하고, 그들 하나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였으며, 상상 속 대륙의 지형까지 구상했다. 서랍 한 구석에는 그렇게 적고 그린 설정들을 켜켜이 쌓아가며 언젠가 이 설정들로 나만의 판타지 대서사시를 써내려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상상들은 결코 글로 쓰이지 않았다. 설정이라고 써놓은 것은 단편적인 사건들에 불과했으며, 그 많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 전혀 생각도 해놓지 않았다. 써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읽다보면 나중엔 쓸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대신 철학이나 사회학 같은 인문도서를 읽었다. 정작, 내 눈 앞 친구들과의 관계, 사람과 관계 맺는 법에 대한 건 전혀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래, 그때 나는 책만 읽는 '찐따'였다.


  상상만 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구체화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아마 교내 문학상 어쩌구 하는 기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쯤 와선 판타지는 졸업하고 순문학 뽕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중에서도 이야기보단 인물의 심리와 감정선에 치중한 소설들에 빠져있었고, 자연히 내 첫 소설도 그런 형식을 띄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이야기 자체는 코맥 메카시의 '더 로드' 표절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소설 원본을 찾을 수가 없어 기억에 의존했다)


  소설의 내용은 지구가 이유 모를 사건으로 멸망한 후 한 집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흐름이랄 것도 없이 사실상 아버지의 심리와 감정 묘사, 그리고 우중충한 분위기 묘사만 잔뜩 집어넣었다. 그래도 그때는 나름 첫 소설인데다 상도 받아서 내게도 이야기를 쓸 힘이 있구나 자신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이야기 쓰기에 도전한 것은 대학교를 들어와 소설 동아리에 들어가서였다. 이때 쓴 소설들도 다분히 심리묘사에 치우친 소설들이었다. 합평을 하며 선배들이 문장을 칭찬하고 소설 형식에 대해선 쓴소리를 했다. 당시의 나는 칭찬에만 귀가 열려있었다. 지극히 사변적인 내용이라는 비판은 '뭘 모르는 선배의 소리'로만 치부하고 넘어갔다. 여전히 '경험'에 대한 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등한시한 채 책에만 몰두했다.


  부족함을 깨달은 건 복학 후였다. 처음으로 심리가 아닌 '이야기'를 이용한 소설을 써보려고 했을 때. 내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고 머리는 울렁이기 시작했다. 지극히 단순한 대화를 묘사하려는데도 원하는 단어는 안 나오고 억지로 쏟아낸 문장은 글에 안 맞을 정도로 만연했다. 대사는 마치 연극투, 혹은 만화 속 대사 마냥 현실과 동떨어진 말투였다. 손발이 다 잘린 채 춤을 추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로는 그려지는데 직접 그릴 수 없는 그 느낌. 담배를 수십 개피를 피운 것처럼 울렁거리는 그 느낌. 


  결국 그 소설은 예전처럼 지극히 사변적이고 심리에만 치중한 소설이 돼버렸다. 그 글을 비평해주신 교수님께선 소설 속 얼마 없는 대화장면을 보고는 이런 말을 남기셨다. 


소설을 쓰려면 현실의 인간경험을 많이 하는 게 더 중요하단다



  말 그대로 치부가 만인 앞에서 들춰진 느낌이었다. 소설에는 소설가의 사상과 지식, 그리고 묘사 능력만 있으면 된다 생각하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며 사회생활을 눈돌려왔던 나에 대한 지극히 정확하고 합당한 비판. 결국, 그 이후로 소설은 쓰지 못했다. 저 말에 충격 먹어서 못 쓰게 됐다는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바쁘고 소설에 대한 의지도 점점 약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안 쓰게 된 것뿐이니. 아직도 소설을 써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건재하다.    


   다만, 이전까지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글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이 이때의 대화로 깨졌다는 것이다. 글로 사랑받기 위해선 타인을 이해해야 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하다. 나의 우울하고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아무리 멋진 필체로 푼다해도, 그건 결국 나 자신의 감정해소에 불과하니까. 

 

 



  여하튼, 사족이 본문이 돼버렸지만 이야기 울렁증은 다시 내게 찾아왔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써본 판타지 소설은 채 1장도 쓰기 전에 턱하니 막혀버렸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선 또 설정부터 짜야한다고 도피처를 찾고 있다. 그래도, 써보려고 한다.


  내게 글쓰기는 감정을 풀어내는 매체였다. 그래서 읽는 건 소설을 좋아해도 쓰는 건 시를 좋아했고, 종종 일기를 쓰며 감정을 풀어냈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은 건 글로 밥 벌어먹는 일이다. 사적인 감정을 넘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이야기. 그걸 추구하고 써내봐야 내가 되고 싶은 카피라이터로서의 일에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다시금 도전해보려한다. 지난 2년간은 나도 이래저래 많은 일을 겪고 나름 '사회적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었으니까. 아주 느리게나마 조금씩 성장해왔으니까. 울렁임을 극복해서 조금씩 조금씩 쓰다보면 언젠간 나도 감정이 아닌 사회의 모방으로서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취미로나마 차근차근 글을 써보자. 내게 글은 힐링이자 극복의 수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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