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린이가 되기로 했다.
바이올린을 다시 배우기로 했다.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내가 바이올린을 꾸준히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첫 번째 이유였고 수강료가 만만치 않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인생에서 바이올린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전교생 1인 1악기를 해야한다는 나름의 교칙이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다른 악기 할줄 모른다고 리코더를 불었다간 수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거라며 엄포를 놓았고 그 덕에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교칙은 내 인생에 아주 좋은 의미로 큰 영향을 주었는데 비단 악기를 배우는 것 뿐만 아니라 방학 때엔 음악회 다녀오는 게 숙제였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될수록 연습은커녕 바이올린 꺼낼 시간도 별로 없게 됐다. 그냥 집 근처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나름의 여유시간이 있었을 것이나 당시 나는 외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토익토플 만점을 받는 유학파 친구들과 경쟁을 해야하다 보니 연습에 쏟을 시간이 적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이올린이 좋았다. 어쩌다 시작하게 됐고 학교 방과후 수업을 들은 게 전부인 데다가 연습량도 부족했기 때문에 초보 수준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현악기 특유의 소리를 좋아했다. 또 중학교 졸업 전 음악 선생님의 강요로 학교 오케스트라에도 잠깐 참여하게 됐는데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다른 악기들과 협주를 했던 게 아주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숱한 시간 닥쳐있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랴 바빴다. 그리고 이십만원 조금 안되게 주고 샀던 악기는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한 사촌동생에게 물려주었다. 악기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더 빨리 다시 할 마음이 들었겠지만 없다 보니 먼저 손을 댄 게 피아노였다. 반 년 정도 성인용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재밌다기보다 지루함이 더 컸다. 피아노의 선율도 분명 아름다웠지만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향이 더 매력적이었다. 바이올린 특유의 울림이 너무 그리웠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바이올린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할 수 있을지 여부와 앞으로 들게 될 수강료 부담 때문에 결정을 미루고 미뤄왔다.
그러다 용기를 냈다.
전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서 항상 모임을 찾아다녔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이 너무 싫어서 어떻게든 사람들 틈에 섞이려고 노력했다. 그런 지금은 서울에 한 번 올라가는 게 고된 일이라 자발적인 의사 반 비자발적인 의사 반으로 많은 시간 혼자 보낸다. 사람과 대화할 일이 많지 않은 삶에 적응하는 게 퍽 낯설었지만 환경에 맞춰 지내다 보니 익숙해졌다. 주말 저녁마다 들이닥치는 외로움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처음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 볼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떠오른 게 바이올린이었다.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야 말로 다시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느 유투버의 말처럼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는 것보다 음악회에 가서 연주를 듣는 게 훨씬 값이 싸다. 특히 가성비를 외쳐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악기를 배우는다는 게 과연 잘 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한편 성취감 없이 무기력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니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현명할 거란 생각도 든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만큼 현재의 시간을 잘 채우는 게 더 중요할 거라 믿는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따분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부디 이 새로운 시작이 나에게 반가운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부터 다시 바린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