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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Oct 14. 2023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결말

겸손은 미덕이다

일을 하다보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된다.


  내가 겪었던 이들 중에 대표적인 유형을 꼽자면 크게 두 가지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어떤 이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한도 내에서 큰소리를 떵떵 치고 다른 이는 겸손한 자세로 조언을 구한다. 전자의 경우엔 보통 대화 과정에서 트러블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엔 이야기가 훈훈한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건 아주 단순한 진리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땐 상대가 그 분야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가를 시험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에게 의견을 청하는 과정이라는 것. 또한 묻는 입장에서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의 말을 최대한 경청해 들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https://www.apa.org/monitor/2020/09/increasing-providers-color


어느 날 불행이 내 앞에 뚝 떨어졌다.


  진상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요즘엔 직접 발걸음 하는 경우는 적고 문의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더 많다. 대부분은 수 분 내에 해결되는 일이지만 하루에 한두건은 꼭 내용이 길어서 십분도 넘게 전화기를 붙들고 있기도 한다. 그 날도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바빠서 정신이 없었지만 나름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나른해지는 오후에 걸려온 전화였다. 조금 지쳐서 약간 정신이 멍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목소리만으로도 이 통화가 힘겨울지 아닐지 느껴진다. 그녀는 확인할 것도 있고 겸사겸사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으나 묵묵히 질문 내용을 들었다.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쉬운 말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궁금하니깐 알려달라는 투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확신 하에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을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꼭 그런 식으로 하는 얘기를 들으면 맞는 말을 해도 괜히 답해주기가 싫은 마음이 든다. 물론 마지못해 답을 해주긴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알고 계신 것이 맞다 하고 끊으려 했다. 네 맞습니다 하는 대답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까지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내 답변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술래잡기 하듯이 이어진 긴 대화 끝에 그녀는 만족스럽지 못한 투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그냥 게시판에 글 쓸게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지만 사실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이 글을 쓰시면 어짜피 저에게 돌아와요. 결국 담당자에게 직접 연결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녀는 사실 정부 지원금을 받아야 한다는 목적만 분명했을 뿐 어떤 조건에서 지원이 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공고문을 읽어봤느냐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셈한 숫자가 맞는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숫자에 집착을 하기에 그 계산을 정확히 하신거냐 물었다. 그녀는 확신에 찬 어투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잘 하셨다, 그 계산이 맞다면 그 금액이 맞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연 그 계산이 맞는지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를 물었다. 그러자 신경질적인 말투로 뭔가 이상한 것 같으니 나더러 알아내라고 했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내가 답답하다 했다.


알 수 없는 결론이었다.


https://onlinewritingtraining.com.au/different-from-different-than-or-different-to/


때론 아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도 있다.


  어느 날은 보완 받아야 할 서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사업장에선 별다른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대뜸 죄송하다고 얘기를 한다. 뭐 서류 준비가 하루이틀 정도 늦을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내가 일러준 서류들을 준비해 봤으나 지원대상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못 내고 있었다고 했다. 힘들게 준비했을텐데 지원이 안 된다니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상 외로 그는 체념한듯 했다. 지원대상과 요건 같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더라면 그에 맞게 준비할 수 있었을텐데 본인이 무지해서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엔 포기하고 다음 번에 다시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상심이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담담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에 내 몸이 반응을 했다. 이대로 그냥 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처음에 혼자서 뭔가를 하려다 보면 잘 몰라서 놓치는 일이 꼭 생긴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혼자 서류를 준비하다 보니 간과한 부분이 있었고 그 한끗 차이로 지원금을 놓치게 생긴 것이다. 이전에 같은 상황에서 어떤 이는 같은 자신에게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며 내게 책임을 전가했다. 또 다른 이는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억울함을 내게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별 거 아닌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동했다. 누구에게나 어려울 처음이지만 가능하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잘못이니, 어쩔 수 없죠.' 그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이래저래 찾아 보니 다행히 다른 방법으로 지원이 가능했다. 처음엔 내 수고스러움을 우려해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던 그는 한결 밝은 목소리로 감사하다 얘기했다. 나 또한 이번 한 번만 기회를 드리는 거라고 얘기를 했다. 다음엔 관련 규정을 잘 살펴주셔야 한다는 당부도 했다. 그렇게 그 날에 나누었던 대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그에게도 기쁜 일이겠지만 업무 담당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에서도 꽤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런 하루엔 피곤함도 금방 가신다.


나에게도 감사한 일이다.


https://weqip.com/chasing-happiness/


호구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겸손은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굳이 겸손할 필요가 있냐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지나친 겸손이 해가 될 때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동의한다. 뭐든 적당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누군가의 하루에 좋은 에너지를 선물할지 아니면 불행을 던져둘지가 나의 몫이라면 나는 기꺼이 겸손함을 꺼내 보이고 싶다. 지나치지 않고 딱 적당한 정도의 따뜻함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상대를 만나 좀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길 희망한다.


겸손함을 잃지 않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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