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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Mar 06. 2023

어려운 발걸음

그 작은 문턱을 넘기 어려웠을 사람을 떠올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오늘도 전화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일은 주말이 지나는 동안 쌓여 있었다. 하지만 월요병의 여파로 잠을 이루지 못해 약간 피곤한 상태였다. 별로 기운이 나진 않았지만 출근했으니 밥값을 하기 위해 어기적어기적 업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사업장에서 신청한 내역을 보게 됐다. 정부 지원금 신청을 위한 서류를 제출했는데 검토해 보니 미비한 게 있었다. 추가 확인이 필요한 내용이라 사업장의 업무 담당자에게 연락해 뭘 더 준비하면 되는지 말했다. 늘상 있는 일이다. 신청 내역을 보고 서류가 완비되었는지 확인하고, 지원요건이 맞는지 검토해서 필요한 요청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 이대로 완벽하다 싶으면 결재를 올려 사업장에 돈을 지급하는 일.


내게는 전혀 별일이 아니었다.


  숨 가쁘게 오전 할일을 마무리 짓고 다시 정신 없는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모니터 화면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덥썩 내 앞에 앉았다. 누구신지를 물으니 내가 담당하는 지역의 사업장 관계자라고 했다. 사업장 이름을 확인하니 오전중에 서류 보완을 요청했던 사업장이었다. 내 요청사항에 대해 별다른 의사표현이 없어 곧 추가로 서류를 제출하겠거니 생각했던 곳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를 물으니 내가 한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왔다고 했다. 모르겠다는 질문은 하루에도 수차례 받는지라 예의 답변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


이건 이렇구요, 저건 저렇구요. 제가 요청드린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렇게 준비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한창 다른 일을 하고 있어 마음이 성급했기에 이 정도 설명이면 적당하지 싶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대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어지는 질문세례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마주보니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뒤 다시 한 번 자세히 관련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가지 예시도 곁들였고 제도의 취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내 말을 곧잘 알아들었고 이대로 설명이 끝나는듯 했다.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곧 방문객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마무리 멘트로 '자, 이제 되셨을까요?' 하는 말을 꺼내기 직전이었다.


여기 세 번째 오는 건데 담당자를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출처: 에듀윌 공식 블로그


  그는 운이 아주 나쁘게도 전화를 걸거나 방문을 할 때마다 내가 일찍 퇴근을 했거나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런 업무를 처음 해 본다고 했다. 처음인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다보니 너무 낯설고 이질적이라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와 보니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뻔한 결말로 끝맺을 줄 알았던 이야기의 새로운 서문이 열리는듯 했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지내느라 잊었던 '직업인으로서의 사명감'에 불씨가 당겨졌다. 어쩌면 그저그런 하소연에 불과한 그 이야기가 나의 의식을 일깨우는 주술과도 같았다.


  선배들은 불필요한 얘기는 좀 자제하라고 늘 조언해줬지만 이 선량한 시민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 버린다. 당신의 도움을 기다렸다는 이들을 어찌 외면할 수가 있나. 적당히 선을 긋는게 난 체질에 맞지가 않는다. 결국 그렇게 1시간가량 상담을 하게 됐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는 것으로 끝내기에 상대의 눈은 너무 초롱초롱했고 나는 또 그 눈망울에 당해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이다.  '어려웠다'는 토로에 마음이 동해버린 까닭이다.


  기나긴 상담이 끝나고 다들 내게 물었다. 저 사람과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느라 오래 걸렸느냐고. 저렇게 오래 있다가면 진이 빠지지 않느냐는 질문도 했다. 그렇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한 시간 동안 얘기한다는 게 쉽진 않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아무래도 부족한 체력이 더욱 바닥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혼자서 머리를 싸매봤자 잘 알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고 그래서 나를 기다려왔다. 원래 처음이 다 그렇다는 말로 그를 위로했고 언제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문의하시라 얘기도 했다. 아무렴 너무 어렵다고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안 되지. 머리가 아프더라도 견딜 수 있을만큼 적당히 아파야지.


출처 glamour magazin UK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아주 약간의 보람이 스쳐지나간 그런 하루였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긴 시간 상담을 했고 끝나고 집에 가서는 문득 엄마아빠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지내는 부모님이 항상 걱정이다. 어디 가서 잘 모르는 상황을 맞딱뜨리고 혼비백산하게 될까 하는 걱정도 든다.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들의 난처한 감정이나 당황스러움을 보다 잘 이해한다. 그래서 자꾸만 잔소리가 늘어간다. 때문에 엄마는 팔자에도 없는 시집살이를 한다고 아우성이다. 나 역시 잔소리를 늘어 놓는 방식으로 두 분의 안전을 염려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민원인들을,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었다. 그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공무원은 영혼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내 영혼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한 때 나는 보수적인 조직문화에 내 역량을 과소평가 당해 힘없이 주저 앉았고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여전히 탈출을 꿈 꾸는 중이다. 그런 한편 내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충하고 싶고 그래야 수지타산이 맞다고 스스로 되뇌기도 하지만 진심 어린 마음들을 마주하고 나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감사하단 인사는 평소에 들을 일이 거의 없지만 그 몇 안 되는 기억이 가슴 깊은 곳에 오래도록 박혀 있다. 한참 불만을 토로하다가도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런 격려가 주는 힘 덕분이다.


내 영혼은 언제나 열정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다.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아직은 유효하다. 다만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간다. 너무 뜨겁게 타오르면 주체할 수도 없을 만큼 무너져 내린 끝에 재가 되어버릴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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