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여신 Feb 16. 2023

탁상행정

공무원의 업무 이야기

JTBC 뉴스룸에 실업급여 관련 뉴스가 보도됐다. 한 택시 노동자가 실업급여 신청서에 날짜를 착오 기입했고 이를 고용부에서는 허위 신고로 받아들여 실업급여 환수 명령을 내렸다. 다툼은 소송전으로 비화되었고 행정법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공무원은 원칙주의자다.


  모든 업무는 법령 그리고 세부사항을 규율하는 내부지침에 의거해 처리한다. 그래서 공무원의 재량권 범위는 매우 좁다. 대체로 법은 엄격하고 명확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적다. 물론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괄적으로 규율하기 어려워 예외 조항을 두긴 하지만, 규정을 무한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은 일부 사례만 허용 가능한 것으로 엄격하게 한정짓고 있다. 그래서 규정이란 가장 객관적인 듯 하지만 다른 상황에 다르게 적용할 여지가 적어 그다지 공정한 잣대는 아닐 수 있다. 그 만큼 복잡한 현실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법이 드물다.


  그래서 담당 공무원은 원칙주의자가 된다. 물론 일부 사례에서 불가피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예외적 사례를 폭넓게 인정한다면 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거나 규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적법하고 문제없는 행정행위를 위해 대부분의 업무 담당자는 지침 등에 적혀 있는 내용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무언가를 질문했을 때 규정에 적혀있는 그대로를 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이 과정에서 다른 대안을 고민해보거나 예외 사례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숙려가 빠져 있다. 담당자가 책임을 질 일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너무 많은 업무가 쌓여있는 탓이다.


  한편 공무원들 대부분은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 그래서 각 개인이 호소하는 저마다의 사정 그리고 각 사업장의 실정을 다 파악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업무도 자주 바뀌는 편이다. 간혹 한 업무를 꽤 오래 담당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3년 주기의 인사이동으로 인해 업무 변경이 잦다. 담당자가 맡은 업무와 지역이 고착될 경우 불미스러운 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더욱 담당자는 법령집 그리고 지침의 문구에 집착하게 된다. 해당 업무에 대한 경험이 적어 노하우가 없을 때에 믿을 건 빼곡히 쓰여진 글자 밖에 없다.


하지만 글자 너머의 세상은 더 다채롭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다.


Photo by Wesley Tingey on Unsplash


원칙은 사실 불편하다.


  기준이 있어야 명확한 판단이 가능한 건 맞지만 모든 상황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따른다.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신규자였을 땐 나도 유연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처음 배울 때라 '원칙은 반드시 지키라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적힌 내용을 그대로 복기하는 것만으로는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가 많았고 원칙을 고집할수록 다툼이 생겼다. 그러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게 맞는걸까.


  업무를 시작한 지 4년 쯤 되었을 때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우연찮게 한 업무를 3년 가까이 맡게 되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접 현장을 돌아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됐다. 자리에 찾아오는 이들을 앉아서 응대하는 것과 그들의 현장에서 실제의 환경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된 것이 서류만 잘 쓰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행정문서 작성이 익숙지 않고 법령에 대한 이해도 깊지 않다. 때문에 내 역할은 그들이 제출한 서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맞도록 함께 고쳐 나가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해 방법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https://www.newwomanindia.com/work-management-tips-busy-woman/


탁상행정이란 말을 제일 싫어한다.


  공무원이 되기 전부터 싫어했고 지금도 여전히 싫어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도 입사 초기엔 탁생행정을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풍경도 낯설었고 아는 지식은 한정적이었으며 겪은 일도 많지 않아 노하우도 부족했다. 그 때는 매달릴 대상이 각종 지침서와 법령집뿐이었다. 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유연함을 많이 키웠다. 유연성을 중시 여기는 선배들을 많이 만났던 영향도 크다. 그들은 내게 부러지는 각목이 되지 말고 유연하게 휘어지는 갈대가 되라고 했다. 무조건 엄격하게 대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유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덕분에 사람을 대하는 것도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뉴스에 보도된 실업급여 환수로 관련한 소송전도 마찬가지다. 허위인지 착오인지를 판별해 낸다는 게 사실 쉽지 않다. 한끗 차이로 부정 행위 또는 정당 행위가 되는데 그 사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게 어려운 일이다. 서류에 쓰여진 대로만 놓고 보면 원칙상 부정행위가 맞다. 객관적인 사실관계만 따져보면 서류에 기입된 일자가 요건 검토의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합적인 상황을 놓고 본다면 꼭 부정행위는 아닐 수 있다. 그러한 판단은 지침이 내려주지 않는다. 착오로 발생한 행위인지 부정수령의 의도를 가진 행위인지 서류가 다 이야기 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동안의 업무 경험 그리고 민원인과의 자세한 대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조직 내에 여전히 각목같은 분들이 있다. 오랜 연차의 선배들 중에도 원칙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다. 후배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유연성이 길러지겠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선배이거나 상사인 경우에는 설득이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민원인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조금씩 다르다. 기본적인 원칙만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허용 가능한 예시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원인들은 자신의 사정에 맞는 맞춤형 설명을 제공받기 원한다. 그런데 각자 업무를 대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보니 때로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Photograph by Alec Soth / Magnum


해결이 결코 쉽지는 않은 문제다.


  업무를 하면서 지침과 규정에 얽매여야 하는 입장으로서 전체 상황을 고려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큰 그림을 보기 데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기준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다른 각도로 고려하기 위해 그 만큼 실무경험과 지식도 많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다 전문적이고 맞춤형의 서비스 제공을 원한다. 공공 서비스 품질에 대한 기대가 때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그 이상일 때도 있다. 게다가 개인의 성향이 업무 스타일에도 반영되다 보니 내부에서도 주장이 엇갈릴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개선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회사가 사내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숙지할 시간도 없이 그냥 일이 던져지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구조에서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리려 고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적거나 없으니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개선하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려는 노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의 '그저 굴러가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는 지금의 분위기가 바뀌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하던대로' 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안전한 데다가, 자리를 위협받지 않다보니 바뀌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공직사회는 개편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경직된 분위기가 존재한다. 물론 편협한 생각에서 탈피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아직 다수가 그런 방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글자 안에 갇혀 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는 아주 커다란 조직 내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부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의 설명을 제공하려 한다. 누군가의 행위가 고의가 아닌 실수 혹은 착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상대도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보다 관용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https://www.gallup.com/workplace/396470/bridge-generational-gap-recognition.aspx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포용적인 민원인이 여전히 많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업무상 고충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입의 말이 킹받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