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저울질하고, 선택하였다.
할머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버지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망가졌다는 단어가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술과 담배 속에 파묻힌 채,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온다. 너희 아빠 좀 어떻게 해봐-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우리 남매에게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우리 역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였다.
만약, 애정과 관심을 쏟을 무언가가 있다면 괜찮아질까. 작은 희망을 품고 아버지에게 제안을 했다. 아빠, 개 한 마리라도 키워보면 어때? 그렇게라도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개를 보러 가자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네 펫숍에 들어섰을 때, 강아지 한 마리와 아버지가 눈이 마주쳤다. 다른 강아지들을 둘러보다가도 한참 그 앞을 서성이다, 그 작은 녀석을 데리고 오게 되었다. 검은 털빛에 짧은 다리를 지닌, 암컷 닥스훈트는 그렇게 부모님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데리고 온 다음날부터 아이는 기침을 시작했다. 가까운 동물병원을 찾아가 약을 타 왔지만, 차도가 없었다. 동물병원 원장님은 아이를 유심히 살피더니, 홍역 검사를 제안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이며, 무탈하기를 바랐건만 결과는 양성이었다.
강아지 홍역, 살아날 확률 20%, 살아나서 장애가 없을 확률 20%.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떠나보낼 확률이 너무 높다. 치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발작과도 같은 후유증이 심각하다. 홍역을 겪은 강아지를 키우는 주인들은, 발작을 하는 아가를 안고 울며 병원으로 달려오는 일이 많다한다.
부모님께서 아픈 아이를 돌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상태가 안 좋으신데, 과연 키울 수 있을까. 우리가 키우려 해도, 나도 여동생도 노견을 키우는 중이었다. 분양을 해 주겠다는 주위의 제안에도, 새로운 강아지를 들이는 것을 늘 포기한 이유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건강이 안 좋아지는 아가들 때문이었기에. 아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강아지를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펫숍에서는 홍역일리 없다는 반응이었다. 가게와 연계된 동물병원에서 검사를 한 뒤에 카드 결제를 취소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직접 찾아간 매장에서는, 가게 내부에 있는 호흡기치료 기구를 이용하니 호전이 되었다며, 홍역일리 없다는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작은 실랑이 끝에, 가게와 연계되었다는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도 '양성'이라는 검사 결과가 뜬 이후에 카드 결제가 취소되었다.
"동물병원 말 너무 믿지 마요. 뭔 뜬금없는 검사도 그 돈 내고 해요?"
펫숍 사장의 이야기였다. 굳이 왜 홍역 검사를 했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며칠 키웠는데, 강아지 한 번 안아보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고."
마치 개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돈으로 사놓고는 마음에 안 들어 반품을 한다는 식이었다.
"집에 열 살 넘은 노견이 두 마리가 있는데. 애들 옮으면 어떻게 해요?"
며칠간 데리고 있던 아이와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입고 있던 옷을 다 세탁기에 넣고 샤워까지 마친 이후에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한 생명을 반환했다. 아마 그 강아지는 안락사를 당할 확률이 높겠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선택을 하고선 끝까지 책임을 져 주지 못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생명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아가와 오래 키운 아가. 나는 내가 키우는 나이 든 아가가 더 소중했고, 결국 생명을 선택하고, 반환했다.
생명을 돈으로 산다는 행위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펫숍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분양받은 아이였다면 어떠했을까. 지금은 '돈'을 매개로 생명을 선택하고 반환하였지만. 그때에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때에도 치료를 포기하고 편히 보내주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매정하지만 끝까지 책임진다는 선택을 할 자신이 여전히 없다.
아버지는 더 이상 펫숍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유기견 센터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리고 아버지도 계속해서 눈에 밟히던 아이였다. 8년이란 시간 동안 부모님 곁을 지키다, 갑작스럽게 떠나간.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생명의 무게에는 경중이 없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 부끄럽고도 미안한 그날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