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묻지 않은 아이의 시각
아이가 말을 꺼낸다.
"하늘이 보라색이에요."
창문으로 다가가 함께 하늘을 바라본다. 보라색? 내 눈에는 그저 흐린 하늘일 뿐이었다.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유심히 하늘을 바라본다. 해질녘의 노을이 존재감이 없는 날이다. 구름이 낀 하늘은 흐릿한 회색을 띄고, 옅은 보랏빛이 듬성듬성 덧칠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네, 옅은 보라색이라 예쁘네."
아이의 감성에 타박이나 핀잔을 주기 싫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니, 배시시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해가 완전히 져 까만 하늘이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창문 밖을 흘끔댄다. 그리도 예쁠까. 혹시 공부하기 싫은 마음은 아니겠지, 라는 부정적인 마음은 담아둔 채 수업을 이어간다.
배시시 웃던 아이의 표정이 떠오른다. 내 눈에는 그저 흐린 하늘이었을 뿐인데, 그 아이의 눈에는 왜 보랏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까. 나는 아름답다 느끼지 못하였는데, 아이의 눈에는 어찌 그토록 곱게 느껴진 것일까.
눈이 높아진건가, 티 없는 파란 하늘에 익숙해지고 다채로운 주홍빛을 뽐내는 노을빛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흐려진 하늘은 지레짐작 뻔하다는 인식을 해 버렸나보다. 그래서 옅은 빛깔을 뽐내는 것들을 흘려보낸 탓에, 작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어려워졌나보다.
나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어른이라 하던 한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어릴적에는 "나는 지금도 나무가 아름다운데?"라는 말로 반박을 했었고, 어른이 된 이후 같은 말을 전해주면 몇몇 아이들도 같은 반응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나이"가 아닌 "취향"일 터인데, 나는 아이들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을 가졌기에 이전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이 줄어든 것은 아닐까.
다음날이 되니, 흐린 하늘을 벗어나 다시 맑은 하늘이 찾아왔다. '티 없는 하늘'이란 표현에 걸맞게 파란 하늘이 길게 늘어진다. 가을 하늘이 짙은 파란색을 뽐내며 청명함을 드러낸다면, 이 시기의 하늘은 옅은 파란색에 연보라색을 살짝 섞어놓은 듯한, 물을 조금 더 섞은 하늘빛이다. 군데군데 옅게 칠해진 하늘은 가을하늘보다 사진으로 기록하는 횟수가 줄어든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그 이유일테지만 말이다.
선명함만을 선호하다 어느덧 흐릿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나보다. 잘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찰나에 느껴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간과하게 되었나보다. 선명해야만, 그리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야만 아름답다는 편견에 잡히고 말았다. 보라색을 이야기하던 아이의 눈에서 느껴진 아름다움을 전해받고 싶다. 지금은 잃어버린, 때묻지 않은 그 시각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