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먹을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히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국내의 현대소설이다. ‘식인’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소재라기보다 이야기의 전면과 클라이맥스에 담아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는다. 리뷰나 댓글에서 읽다가 중단했다는 평가들이 많이 보였다. 사실 이 리뷰를 쓰는 이유는 대부분의 리뷰들이 '엽기적',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남긴 것이 굉장히 아쉬웠기 때문이다. 나도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몰입도가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담담하지만 섬세한 유형의 필체였기도 했지만, 나에게 사랑에 대한 강렬하고 얼얼한 경험을 제공했다. 엄연히 스테디셀러인 작품인데 저평가 되고 있어서 내 짧은 식견으로라도 이 작품의 진가를 알리고 싶었다.
줄거리는 남자 '구'와 여자 '담'의 지고지순하고 변화무쌍한 사랑이 비극으로 끝을 맺는, 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다. <구의 증명>이 문제적인 것은 비극적 결말은 전혀 흔하지 않은 '식인'이라는 행위로 맺기 때문이다. 정작 식인을 묘사하는 문제적 문장들은 분량이 아주 적다. 그러나 오히려 남녀 사이에 찾아온 많은 사건들을 식인 행위로 '해소'하며 끝을 냈다는 것이 나에게 충격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었다.
<구의 증명>이 문제적인 이유는 좀비나 괴물이 사람을 먹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먹히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먹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가. 시각적 잔혹함때문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그런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경우가 많다. 다들 눈을 찌푸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극적인 것에 끌린다. 좀비나 괴물이 사람을 먹는 장면이나 악인이 먹히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합리적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보면 잔인함이 이 소설의 문제점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사실 이 소설에서 식인 행위 묘사가 그렇게 잔인한 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이 작품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는 식인 행위 자체나 잔혹한 묘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먹는다는 납득할 수 없는 비합리성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진리와 식인이라는 보편적 금기가 하나로 묶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하지만, <구의 증명>을 이 불편함만을 가지고 리뷰하고 평가하기엔 아쉽다. <구의 증명>이 출간된지 오래됐음에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여전히 오르고 있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다수의 독자들에게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금기’라는 예술적 장치와, 작가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왜 ‘먹는 행위’를 선택했는지, 그것이 왜 이 소설의 제목과 전체를 관통아는 것인지 이해할 때에라야 <구의 증명>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 하는 이들에게는 <구의 증명>이 엽기적이고 별난 소설로만 남겠지만, 불편함을 걷어내는 작업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구의 증명>이 주는 사랑에 대한 철학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금기를 다루는 문학작품에 끌리는 편이다. 불편함 혹은 불쾌함으로 둘러싼 속에 의미를 담는 역설의 모습에 끌리기도 하고, 사회보편적인 규칙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묘한 쾌감 때문이다. 사회적 규칙과 상식은 편의와 공존을 위해 형성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억압하기도 하고, 주체성을 축소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히어로물의 악역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와 같은 결인 것 같다. 억눌린 욕망,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되어있는 악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 그런 거겠다. 그런 면에서, 예술에 있어 금기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문학에서는 서사적 요소로서 갈등을 촉발하면서 금기와 금기를 수호하려는 노력, 긴장과 불안 등은 독자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구의 증명>에서 금기는 어떻게 작용했을까? 대부분의 문학의 금기들은 갈등을 촉발하는 '발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결말과 해소로써 사용되었다. 금기로써의 식인행위로 사랑의 진실을 풀어낸 작가의 의도가 탁월하다는 점에서 <구의 증명>의 작품성이 인정된다고 생각한다. 금기를 비도덕적인 불편함이 아니라 예술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독자에게는 ‘은유’라는 눈이 필요하다. 은유를 의식하면서, 표의와 진의를 구분하면서, 해석하고, 벗겨낸다면, 금기의 역겨움이 진실을 깨닫는 카타르시스로 승화된다. <구의 증명>에서 그 도구가 바로 '먹는다'라는 표현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풍부한 의미로 일상에서 많이 쓰인다. 친구 먹는다, 한 방 먹인다, 겁을 먹다, 욕을 먹다, 1등을 먹다, 나이를 먹다, 경고를 먹다, 나라를 먹다 등등등 무수히 많다. 사실 먹는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행위이고, 매우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단순히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필수적인 행위이기 생명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때문에 생명의 가치와 관련된 논의를 다룰 때 먹는다는 행위는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식생활과 관련하여 문화적 차이나 윤리적 이슈를 논의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종교나 문화에서 특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종교와 문화에서 지향하는 바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는 주로 인간 삶에 대한 지혜 또는 지향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삶의 자리와 지향을 드러낸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먹는다는 행위는 곧 관계, 가치, 생존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특히 문학적 맥락에서 먹는 행위의 주체의 의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 주로 관계와 소유의 맥락으로 쓰여진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것만으로도 문학에서 쓰이는 용례들을 깊게 알아보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구의 증명>에서 "나는 너를 먹을거야"라는 표현을 금기가 주는 충격에 더하여 먹는다는 은유를 엮어서 사랑을 풀어내는 방식이 매우 독특해서 나에게는 그 임팩트가 더욱 크다. 그래서 이렇게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에 참여하는 일은 매우 즐겁다.
나에게는 <구의 증명>보다 더 위험해보이는(?) 작품이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였다. 제목이랑 말도 안되게 안 울리는 포스터. 소, 돼지의 내장이라면 나도 매우 좋아하는데(...) 포스터는 선남선녀였기 때문에 호기심이 더해졌다. 애니메이션이어서 고어 좀비물인가 싶었는데, 사실은 굉장히 전형적인 일본의 청춘물이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 뜻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첫인상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먹어 줘."
"난 췌장이 아프지 않은데?"
"누가 날 먹어 주면, 그 사람 안에서 살 수 있대.
난... 살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영원히."
제목의 의미는 췌장이 아픈 여주인공이, 옛날 사람들은 치료를 목적으로 자신이 아픈 부위와 똑같은 동물의 부위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이다. 단순한 전설을 모티브로 했지만, 작가는 의미를 관계성의 측면으로 재해석한다. 먹는다는 행위는 필요한 에너지들을 몸에 채워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하나의 생리학적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먹는다는 표현으로 의미를 감싼다면,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생리학적 표현 그대로, ‘그가 내 안에서 여전히 있다’는 위안이 될 수도 있고,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서 먹는다는 것은 사람을 떠나보내며 밀려오는 슬픔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식으로 그리려던게 아닐까 싶다.
전설 혹은 풍습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사람들의 상상력이 현대 사람들에겐 표면적으로 이상해보일지언정, 삶에 대한 사유와 표현은 훨씬 깊어보인다. 물리적인 사실을 관계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은 탁월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먹는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을 듯하다.
제목을 처음 접하고 경악했던 사람들은 영화 끝에 가서는 제목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면서 의미의 전환은 분명했으리라. (개인적으로 일본 청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보지 않을 것 같고 추측만 해본다) 실제로 먹는 행위는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구의 증명>과 장르가 전혀 달라보이지만, 함의에 있어서 결이 같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던 중 아리스토파네스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길, 최초의 인류의 몸은 본래 완전한 하나였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한 상태가 되면 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신이 인간을 반으로 잘라 남자와 여자로 분리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 태초의 모습이 '완전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고 욕구하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에로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구와 담이 서로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묘사되지 않는다. 언제랄 것도 없이 어릴 때부터 둘은 서로를 좋아하고, 하나처럼 붙어다녔다. 연락이 끊긴다던가, 가정적/경제적 불화가 생긴다던가하는 상황과 환경이 달라져도 둘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잠시 헤어졌을 때에도, 구가 잠시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도, 관계에 대한 믿음은 요동치는 것이 없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는 게 당연한 것처럼, 영원할 것처럼 생각했다. 마치 세상에 단 둘만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말이다.
둘이 하나였다는 확증은 구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맺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한참 나이가 많은 그 여자는 육체적 관계는 맺으면서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어린애마냥 구를 다그친다. 구와 같이 살려했건, 꼰대같은 마인드였건, 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반면에 담은 구가 도둑질을 했을 때에, 다그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대신 죄를 짊어지려 했다. 사랑의 조건이 서로 그 자체가 아니라 돈, 능력, 환경이 당연시되는 세태에서 이 둘의 사랑은 미련해보일지는 몰라도, 인간이 하나였다는 신화적 의미에서의 본질은 충만해보인다. 사랑, 존재에 대한 본질을 가차없이 욕구하는 거침없이 증명하는 소설과 같다고 보인다.
참으로 순수하다 느꼈다. 아니 사랑은 순수하여야한다. 사랑의 조건이 현실, 돈, 환경, 능력 등인 세상에서, 그 나이 많은 여자처럼 구와 담은 미숙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뻔한 말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아끼고 희생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이 사랑이 욕구하는 완전함이다. 구와 담의 아픈 사랑이 곧 둘이 한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애무하듯 입술과 혀로 내 얼굴을 핥다가 조금씩 뜯어먹으며 담은 울었다. 울면서 구야, 구야, 내 이름을 불렀다. 부르며 말했다.
너는 나를 왜 이토록 괴롭게 하니.
너는 나를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해.
내가 살아 있을 때, 담은 내게 너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 적 없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짧은 몇 장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다 길에서 객사한 구를 집에 데려와서 구를 먹는다. 구를 먹으면서 담이 독백하는 대목에서, 세상의 부조리에 식인행위를 대치시키면서 금기에 도전한다.객사해버린 연인을 먹어버린 나는 야만인인가, 사람을 도구 취급하고 먹어버린 부조리한 현실이 야만적인가.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사람이란 뭘까."라는 질문은, 금기와 금기를 지시하는 세상을 도치한다. "연인을 먹는 네가 사람이냐"라는 비난의 방향을 되려 세상에 다시 묻는다. "이게 사람사는 세상이냐." 구가 죽은 뒤에도 빚쟁이들은 그의 주변에 끝까지 독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는 죽어서도 또 다시 죽는다. 그렇게 내버려두느니, 담은 차라리 구와 하나가 되었다. 차라리 구를 먹어서 사람이길 포기하더라도 하나가 되었다.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구의 증명, 구를 증명하는 것은 담이 구를 먹음으로써 담이 구와 함께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는 뜻일수도 있고, 혹은 구를 사랑하는 것을 먹는 행위로써 증명한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먹을거야"라는 표현에는 의지가 포함되어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담은 구를 먹음으로써 구와 담은 본래 하나인 것을 비로소 증명했다. 비극일지언정, 사랑이 세상에 먹히지 않는 것만큼은 증명했다. 하나가 됨으로써 사랑을 증명했다. 담은 사랑을 증명했다.
소설이 끝날때즈음에 내 마음 상태가 이상하리 만큼 먹먹했다. 이 소설을 접했을 때처럼 사람을 먹는다는 말이 전혀 끔찍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구를 먹음으로써만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던 담의 마음에 접속이 되어 소름끼치는 슬픔이 밀려왔다. 한편으로 구를 먹음으로써만 구의 삶을 대신 살 수 있다는 절절한 의지 또한 간접으로 경험했다. 둘의 사랑을 동경하기도 했다. 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본래 하나였던 사람을 만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구의 증명>을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식인이라는 금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 아리게 남아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식인'이라는 단어가 구와 담의 사랑 이야기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금기를 뒤집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뒤집어 부조리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던진 작가의 통찰에 연신 감탄할 것이다.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아픈 상황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문체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강렬한 아픔을 남기는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어. 병들어 죽거나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네 손에 죽는 게 훨씬 좋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모로 누워 팔과 다리와 가슴으로 상대를 옭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