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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Mar 23. 2021

여학교의 미소년이야기

그 때 그 시절 추억여행2



여학교의 최고 인기남은 누구일까?

얼핏 생각하면 학교에서 가장 핸섬한 남자 선생님일 것 같다. 물론 그분들도 인기에 한몫한다. 그런데 세월은 흘렀고 학교에 신규 발령을 받은 남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인기의 중심에 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초임지에서 두 번째로 옮겨간 곳이 운 좋게도 여자중학교였다. 처음으로 발령받은 첫 학교에서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수업을 하느라고 혼이 나기도 했던 터에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하고 대체로 외국어 과목을 잘 따라오는 여학생들만 있는 학교는 여교사들에겐 꿈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4~5년 꽉 채워서 나오고 싶은~~


J는 그 학교에서 후배 여학생들에게 단연 최고 인기를 누리는 여학생이었다. 빼빼로 데이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물을 받고 책상과 부근 창 옆까지 빼빼로가 쌓이고 그 와중에도 빼빼로나 꽃을 들고 그녀의 반을 기웃거리는 후배 여학생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들었을 때 여자아이가 씩씩하고 준수해 보았자 얼마나 남자 같을까 하고 그 말을 다 믿지 않았다. 더구나 여학생들이 그렇게 같은 여학생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고를 졸업한 나 역시 학창 시절 기억나는 선머슴 같은 여학생이 한 둘쯤 있었다. 그녀들은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콧날에 인상이 강해서인지 예쁘다기보다는 잘생긴(?) 얼굴, 큰 키에 어깨가 또래 여학생들보다는 조금 넓고 주로 커트머리였다. 그녀들은 축제에서 연극의 남자 주인공이나 러브송의 남자 파트를 주로 맡았었다. 약간 남자 목소리로 변조해서 'Endless love'의 Lionel Richie 파트를 부르면 강당에 모여 있는 우리는 옆에 앉아 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축제에서 남자 역할을 하면 반짝 인기몰이를 하는 약간 선이 굵은 여학생들 정도가 얼핏 떠올랐을 뿐이다.


이윽고 화제의 중심에 있는 그녀를 직접 대면할 날이 왔다. 학기초 시간표를 보니 그녀가 내 수업에 배정되어 있었다. 새로운 학급에 들어가면 늘 하듯이 학생들의 얼굴을 다 한 번 훑어보게 되는데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묻지 않아도 그녀임을 짐작했다. 커트머리를 하고 앉은키가 커 보이는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에서나 읽었던 딱 그 '미소년'의 이미지였다. 후배들이 우르르 꽃을 가지고 와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출입문 앞에 매달릴 만했다.


하얀 얼굴에 콧날이 오뚝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이런 얼굴을 '미소년'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뭔지 모르게 눈매는 부드러우면서 샤프했고 턱을 괸 옆모습은 더 아름다운 소년 같았다. 예쁘게 말아 넣지 않았지만 대충 한 손으로 가르마를 휘저으면 시원한 이마에 자연스럽게 툭 떨어지는 앞머리 몇 올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쁘다거나 귀엽다고도 할 수 없고 전체적으로 선이 굵지도 않았는데도 묘하게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뭔가 참 익숙한 느낌! 대체 이런 얼굴을 어디서 봤을까? 잠시 후에 나는 그 얼굴을 본 것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많은 소녀들의 마음이 흔들렸는지  알 것 같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건  소녀들의 애독서인 순정만화였다. 정확하게 그녀는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처럼 부드럽고 그윽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소년!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을뿐더러 친절하고 조용하기까지 하다. 교복 옷소매를 걷으면 어딘가 주변 여자아이들보다 조금 더 근육질로 보이는 팔뚝이 드러났고, 창밖을 바라보는 옆얼굴은 더 근사했다.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그렇게 수다스럽지는 않은 듯했다. 게다가 운동에 재능이 있었던 듯 농구나 배구 같은 경기에 학급 대표로 늘 나갔던 그녀는 큰 키에 긴 팔로 플레이하는 내내 그 존재 자체로 여학생들을 즐겁게 했다. "우와! J 언니다!" 아이들은 난리를 치면서 그녀를 보려고 했다. 이쯤 되면 득점을 안 해도 최다 득점한 것과 같은 인기였다.



그녀의 이 소년 같은 모습은 교복을 벗고 나면 더 빛을 발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교문을 나오는데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남학생 한 명과 내놓고 서로 목에 팔을 두르고 멀리서 걸어왔다. 큰 키의 남학생이 옆에 있는 여학생에게 팔을 두르고 서로 얼굴을 붙이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살짝 키가 상대적으로 적은 여학생이 그에게 안긴 것 같은 자세라고 할까?


지금은 일상이지만 당시에는 과도한 애정행각이었던 이 커플에게 주의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남학생은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닐 테니 여학생 얼굴이나 보려고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깜짝 놀랐다. 하얀 캔버스화를 신고 헐렁한 박스 남방의 팔을 걷어입은 키가 훌쩍 큰 그 남학생은 바로 J였던 것이다. 앞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락없는 남학생이었다. 그저 단짝 친구와 다정하게 걸어가는 것이었을 뿐!


그녀가 스스로 남자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다 보니 미소년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보고 대리만족을 하던 여학생들의 역할 기대가 그녀를 그렇게 더 남자처럼 보이게  것인가? 그와 관련해서 어떤 남자 선생님은 그녀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고 들었다고 했고ㅡ남학생들만 대상인 대학도 있었음ㅡ 또래 남학생들이 그녀가 버스를 같이 타면 '재수 없어'한다는 거였다.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이런 문제는 워낙 예민한지라 본인에게 물어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학창 시절 열정의 대상을 교내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웠겠지만 자신의 성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졌다. 사춘기가 되면 사회에서 기대하는 자기 성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여자들이 관심 가져야 할 분야를 필수로 선택해야 하고~~



그 후 남녀공학이 남중고와 여중고보다 훨씬 교육과 성장에 유의미하다는 이론에 힘입어, 점차 남학교와 여학교는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공립학교에서 여자중학교와 여고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나 역시 대부분 남녀공학인 중고에서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다. J 양과 같은 미소년을 더 이상 내가 근무하는 남녀공학에서는 잘 찾아보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이성에게 몰입했고 일부는 젊은 남교사들을 잠시 동경하기도 했다. 교실 앞에서 영화 찍는 아이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공개연애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성 교제에 있어 다소 소극적이었던 여학생들은 세상이 변하자 매력 있는 남학생들에게 먼저 대시했고 더러는 잘 생긴 후배들도 눈여겨보았다. 대리만족을 할 대상이 굳이 필요치 않는 상황에서 남자보다 인기 있는 미소년 같은 여학생의 역할이 불필요했던 것일까? 남녀공학은 장단점이 있지만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 확립에는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더니 여학생들은 가정과 가사를 배우고 남학생들은 기술을 선택하던 시절은 끝나고 아이들은 기술 가정이라는 과목을 배우게 되었다. 학교 현장에서는 기술 선생님이 반드시 가정 부전공을 가정 선생님은 기술을 부전공으로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가정을 왜 여자만 배워야 하나요? 가정은 남녀가 다 같이 행복을 만드는 곳인데...." 라고 하던 중견 가정 선생님의 말씀은 실현되었다.


 남자아이들이 대바늘과 실타래를 들고 가정 선생님에게 한 수 배우러 오고, 여학생들은 책꽂이 도면을 검사받으러 기술 선생님을 줄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술 선생님은 여성 속옷의 종류를 배우고 나시더니 왜 이렇게 여자 옷은 속옷까지 종류가 많냐고 투덜댔다. 이 변화의 초반에 기술 가정 과목은 각각 기술 선생님과 가정 선생님이 자신의 파트를 가르쳤지만 교원 수급상 한 사람이 교과 전체를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가정 부전공을 이수하지 못한 기술 선생님은 이동이 어려웠다.


새로운 통합교과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 양 쪽 교과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체로 남학생과 여학생은 이 새로운 교과를 누가 더 잘 소화해 내는지. 의외로 남학생들은 가정 과목의 실기를 잘 따라온다고 했다. 요리실습은 말해 뭐 하랴! 당연히 남학생들이 환영하는 시간이었다. 이에 반해 여학생들은 꼼꼼하게 제도하고 책장을 만들면서 처음에는 끙끙대는 듯했다. 그러나 요즘 SNS에서 목공예로 집안 가구를 뚝딱 만드는 평범한 주부들의 인테리어 솜씨를 보면 이런 통합교육의 변화의 결과인 듯하다.


요리에 대한 편견은커녕 커리어를 자랑하는 곳에는 남자 요리사가 훨씬 더 많고 어느새 TV의 요리 코너에는 멋진 셰프들로 바뀌었다. 단지 기술 가정을 배우지 못한 윗 세대만 아직도 부인이 장기간 집을 비우면 밥 먹을 일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백종원 씨가 그들에게 구원의 빛처럼 등장해서 누구나 쉽게 요리를 배울 수 있는 덕분에 요즘은 밥 차려 달라고 외출한 아내에게 귀가를 독려하는 간 큰 남편은 잘 없지 않을까 싶다.



결혼과 동시에 그 지방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경력을 이어 나갔기 때문에 소식을 알 수 없는 J! 이제는 사춘기 아이를 둔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절 J에게 이 그림을 건네고 싶다. 커트가 그렇게  너처럼 잘 어울리는 여자들은 흔치 않다고. 두상이 얼굴의 비율과 조화에서 가장 큰 요소이다. 그림을 그려보니 미소년의 얼굴에서 윤곽선에 힘을 빼면 바로 누구나 동경하는 매력 있는 그녀가 된다! 나는 J가 이렇게 멋진 여자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


<손그림 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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