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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Aug 09. 2021

내 손의 시간

예쁘니까 괜찮아. 힘내!


인스타그램 독서 계정을 운영하다 보니 가끔 손으로 책을 집어 포스팅한 사진이 그럴싸해 보였다. 대개  뻥 뚫린 공중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손목에서부터 찍는데 책과 손을 제외한 주위 배경은 흐릿하게 하여 푸릇푸릇한 색감이 은은히 깔려 있으면 더 멋진 사진이 된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과 긴 손톱에 반짝거리는 그분들의 네일아트는 내 허영심을 새록새록 키웠나 보다. ‘이거 넘 간단한데. 나도 해 보지 뭐.’     


아뿔싸! 동네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던 언니가  "너는 손가락이 가느다랗고 길어서 피아노 잘 치겠다.“라는 말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열 두서너 살때  간지러운 칭찬을 아직도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손은 나이 든 여자의 아날로그 감성에 기대자면 여름 태양에 무성하게 자라는 동네 뒷산 토끼풀로 꽃반지를 해서 끼어도 이쁘기만 했다. 그 뽀얗고 보드라운 살결에 조그마한 연핑크의 우물이 손톱 끝에 무지개처럼 비치던 섬섬옥수였던 손이 혼자 노화의 시계를 멈추고 있었다고 생각한 걸까?       


결국 나는 책 사진에서 내 손을 삭제해 버렸다. 한 번씩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면 결혼할 무렵 친정엄마의 얼굴이 나타나 깜짝 놀라곤 하는데  내 얼굴만큼 나이 들고 거뭇거뭇해지고 볼품없는 적나라한 손이라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 손가락 가운데 선명하게 생긴 소용돌이 같은 깊은 마디하며 조금만 길면 경계도 없이 부서져서 머리 감다 가도 손톱이 달랑거리고 뭔가가 쿡 예민한 손톱 살이 찔려서 보면 반쯤 손톱이 날아간 손가락이 보인다. 조금만 길면 사정없이 부러져 버린다.      


하는 수 없이 그저 시간 날 때마다 아무렇게나 짧게 바싹 깎아 주고 있는데 동그랗게 끝을 다듬지도 않는 그 손톱의 어중간한 라인이 나를 무안하게 했다. 자주 맨손을 물에 담갔다 꺼내서인지 손톱 밑에 붙은 살은 자꾸 밑으로 내려가기만 해서 끝을 잘 다듬어 보려 해도 예전의 일정한 테두리의 고운 손톱 모양이 되지는 않는다.      


보기만 해도 눈길을 사로잡는 딸의 새하얀 기다란 손가락과 그 끝에서 힘 있게 자라는 뾰족하고 긴 손톱은 은색 펄이 손톱 전체를 감싸주고 끝부분은 시원한 스카이 블루로 엣지 있게 처리해 준 다음 다시 손톱 위에 동그랗게 산호 같은 장식을 붙여서 화려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였다.  늘 은근히 훔쳐 보는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 손이 래야 되는데! 반지를 끼면 정말 예쁘겠구나!" 찬사를 늘어놓으며 내 초라한 손을 슬며시 식탁 밑으로 내려놓게 된다.   


바쁘고 귀찮다는 이유로 보습크림을 발라가며 가꾸지도 않고 손톱을 짧게 깎다 보니 예전에 예쁘게 가꾸어서 블링블링한 반지를 끼고 자주 손을 쳐들고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시간은 점점 잊힌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외출하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손톱을 잘 다듬고 핸드크림을 바르며 손을 가꿀 의욕도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여름휴가 기간 동안 잠시 친정에게 다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름 더위에 건강은 괜찮은지 고향집에 들렀더니, 엄마는 그릇이 무거워 자주 떨어져서 식기를 자주 깨뜨린다고 남아 있는 그릇이 몇 개 없다고 하시는 거다.  "힘이 없다!" 고 하시는 팔순 노모의 손을 보니 오래전 관절염으로 휘어진 손가락들은 이제 더 휘어져 뭔가  꽉 집기에는 참 힘들어 보였다."이제 시집갈 일이 있어! 뭐 아픈 것도 그럭저럭 괜찮아!" ”복지센터에 가니 60대에 수술을 했다면서 멀쩡한 손을 자랑하는 할머니가 있더라. 근데 뭐 내가 이 나이에 수술할 거 뭐가 있어.” 엄마가 그러시는데 문득 엄마의 아픈 손가락을 예사로 봤던 나의 20대가 클로즈업되었다.      


그때는 집안일을 많이 하고 밥 짓고 빨래하면 누구나 여자들은 그렇게 되나 보다 하고 나 편할 대로 생각했다. 이제는 50대가 된 내 손을 쳐다보며 왠지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초라해도 나는 관절염으로 휘어진 손가락을 가지진 않았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고 주름졌어도 아직 휘어지거나 구부러진 데가 전혀 없는 건강한 손가락이다. 아름다움은커녕 건강도 지키지 못했던 엄마의 손! 그때 엄마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지만 내 손은 아직 멀쩡하기만 한데...      


내가 중년 이후 주부습진으로 손가락이 얇아져서 허물이 벗겨지고 가려울 때 남편은 설거지를 매 번 대신해 주었다. 손에 물 대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대로 고무장갑이 아니면 물일도 가급적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월을 속일 수는 없었으나 집안일과 가게 일에 고무장갑 끼고 수선 피울 여유도 없었던 엄마는 마흔도 더 전에 관절염으로 손가락 몇 개가 휘어져 있었다.. 반지 끼어도 폼 나지 않는다고 반지 사는 걸 마다 하셨지만 그렇다고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다.     


“엄마! 이 거 그릇이 너무 꾸져서 그래. 요즘 누가 이렇게 무겁고 잘 깨지는 그룻을 쓰나? 내가 가볍고 던져도 안 깨지는 코렐로 바꾸어 줄게.”

이제 와서 엄마의 손가락을 바꿀 수는 없다. 혼자 사시는 엄마의 식기를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며칠 후에 택배로 받은 그릇이 넘 이쁘고 마음에 든다는 카톡 문자를 받았다.      


나이 들어도 여자들은 고운 손을 가지고 싶어 한다. 얼굴보다 손이 더 빨리 늙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 세월을 비켜가기만을 바라고 늙어버린 내 손이 부끄러웠다. 내 할 일 다 하고도 좀 더 부지런했으면 더 고운 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의 휜 손가락이 부끄러움이 아니듯 나이 먹고 거뭇거뭇해진 내 손이 딱히 부끄러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고단했어도 내 손으로 먹이고 키운 자식들 앞에서 엄마의 손이 당당했듯이 이 손으로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으니 나도 내 손을 부끄러워하면 안 되겠다.      


이런저런 회한에 딸아이의 고운 손을 부러운 듯 훔쳐보고 있으니 네일아트 도구를 잔뜩 가지고 와서 나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부러워만 말고 직접 해 보란다. 왼손 엄지손가락 하나만 먼저 해 보라고 해서 베이스를 바르고 은색 펄 매니큐어를 2번 바른 뒤 탑 코트도 발랐다. 일하는데 걸리적거릴 듯하여 진주같이 알알이 붙이는 장식은 사양했다. 벗겨 낼 때는 살살 살~ 이렇게 제거제를 발라가며 끝에서 매니큐어를 살짝만 벗겨주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성공한 왼 손 엄지 손가락의 손톱은 집밥 며칠 만에 힘없는 손톱 끝이 먼저 날아가고 손톱 아래와 위의 칠이 동시에 벗겨지면서 삐죽삐죽한 조각만 붙어서 손톱 가운데에 남았다. 흉하게 남은 매니큐어를 아예 닦아낼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다시 그 손톱에 화학약품을 대기가 싫어졌다. 이제 내 손은 생산하는 손이지, 구경하는 손이 아닌 것이다. 손톱을 짧게 깎고 주름이 가득해도 청결하고 건강한 손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내 손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건강을 지켜주어야 하는데 내 손의 시간을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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