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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풍뎅이 Feb 19. 2020

이른 퇴근, 장조림, 생각들


유독 때꼰해 보이던 아이는 정확히 여덟 시에 잠들었다. 오늘은 원에서 낮잠을 안 자고 왔다. 낮잠을 건너뛰고도 열시는 돼야 잠들던 아인데 많이 피곤했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른 퇴근이라 신이 났다. 서둘러 씻고 낮에 읽다만 책을 펴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러다 냉장고에 있는 깐 메추리알이 생각나 장조림을 만들기로 했다.


주말에 동생네 가서 먹었던 메추리알은 표면이 단단하고 짜지도 달지도 않은 꼭 엄마가 해준 맛이었다.솜씨 좋은 동생은 밑반찬 하나를 만들어도 그렇게 맛깔나게 만든다. 흐물거리는 메추리알만 먹던 남편과 딸이 안쓰러워 동생의 레시피를 흉내 내 냄비에 조미료를 첨가한 간장과 물, 메추리알을 넣고 끓이며 노트북을 켜고 이 글도 같이 쓰고 있다.


항상 재우고 나면 나도 바로 잠들거나,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오래간만에 깨어있는, 부지런한 밤이다.

남편은 회식이라 늦고 냄비에 장조림 졸여지는 소리와 간간히 아이가 코 고는 소리만 들려와 조용하다.


오늘, 올겨울 들어 제대로 된 눈이 내렸다. 등원 길에 목청껏 수정 고드름을 부르며 눈싸움을 하고 꼬마 눈사람도 만들었던 유쾌한 아이는 하원 후 오랜만에 간 친구네서 괜한 짜증과 화난다고 친구를 때리는 심통쟁이로 변했다. 보다 못해 이럴 거면 친구네 다신 못 온다고, 빨리 집에 가자 손을 잡아끌고 나왔다. 피곤해서 몸이 안 좋아 예민했겠지 이해하려 했지만 때리는 버릇이 아직도 남은 아이의 모습에 조급함과 짜증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내 마음 같지 않을까.'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마음처럼 쉬웠던 건 없었다. 남들은 척척해내던 모유수유도, 먹고 놀고 재우는 패턴 만들기도 어려웠다. 이유식도 처음엔 거부해 한 달을 기다렸다 다시 시도했고 점점 커가면서는 겁이 많아 남들 다 타는 미끄럼틀도 못 타는 모습에 걱정 반 답답함 반을 느끼기도 했었다.

아이는 여전히 무서워하는 게 많다. 몸을 써야 하는 대부분의 활동에 겁을 먹는다.


사실 내가 물려준 운동신경이다. 어릴 적 새가슴이던 나와 지금 우리 딸의 모습은 많이 닮아있다. 비슷하면 더 이해하고 보듬어줘야 하는데 자꾸 나와 다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순간 훈육도 강요의 연장선이 돼버렸다. 모르는 사람을 봐도 인사 잘하는 아이, 친구들에게 늘 상냥한 말만 하는 아이. 양보 잘하는 아이. 내 기준에 아이를 맞춰 완벽히 착한 아이로 만들려는, 이기적인 훈육. 정작 나는 낯도 많이 가리고 그다지 상냥하지도 않은, 못된 생각도 종종 하는 그냥 보통 사람인데 말이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건 결국 틀에 갇힌 나만의 기준에 빗댄 생각이다. 아이의 키가 천천히 크고 있듯이 내면이 자라는 시간도 천천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성장하는 동안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엇나가는 방향만 바로 잡아 주는 게 어른인 내가 할 몫이지 않을까.(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 인내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냄비에서 졸여지던 장조림의 불을 껐다. 맛을 보니 역시 짜다. 너무 졸인 걸까. 적당한 중간을 만들어내긴 요리든 육아든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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