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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풍뎅이 Mar 23. 2020

걷는다는 것

일요일. 남편과 아이가 킥보드 타러 나간 덕에 혼자 나가 집 앞 아파트 단지를 하염없이 걷고 동네빵집에 들러 빵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많이 찐 살 걱정에 단골 카페에서 커피만 한잔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설거지도 다 못했고 화장실 청소도 남았지만 좀 더 여유를 즐겨보려고 한다.

남편은 저녁에 출근을 해야 하니 혼자 있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오늘 하루 끝까지 아이에게 다정한 엄마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날씨가 화창하면 기분이 좋아져 어디든 나가고 싶어 진다. 가까운 공원도 좋고 동네의 익숙한 길도 좋다. 나는 걷는 걸 좋아했다. 물론 목적은 있었다. 회사 다닐 적에는 더 건강해지려고 출퇴근을 도보로 한 적도 있었고, 더 거슬러 대학교 시절, 차비를 아끼려 학교에서 동네까지 걸어가기도 했다.(버스로 20~30분 거리다.) 딸을 갖고 만삭 무렵엔 오로지 순산을 위해 하루 만보를 채우려 걸었다. 지나온 시간 속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뻐했고 만보를 채워 산부인과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이젠 아무런 목적 없이 걷는다. 그냥 걷는다. 홀로 걸으며 계절도 느끼고 예전에 남편이 서운하게 했던 말, 내가 했던 부끄러웠던 행동 같은 걸 생각한다. 가끔 걷다가 혼자인 모습에 위축될 때도 있다. 동네 엄마들만 봐도 삼삼오오 어울려 다니는데 난 가끔 아는 언니와 만날 때 빼고는 늘 혼자다. 카페에서 내 또래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거나 길에서 앞을 차지하고 걷고 있으면 괜히 쫄보가 된다. 혹시 저 무리 중에 날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다. 내성적인 내게 어려운 일 중 하나가 길에서 아는 사람 만났을 때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각자 갈길 가면 되는데 멋쩍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어릴 적에도 유독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렸다. 엄마 아빠의 "얘가 낯을 가려서.."라는 말이 아로새겨져 내 행동에도 자꾸 제동을 건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나는 쭈욱 그렇게 내성적인 아이였고 중학생 때 나를 싫어하던 아이들을 겪고 나선 더더욱 작아져만 갔다. 곁을 지켜준 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날 싫어하는 애들은 내 뒤통수에 공을 던진다던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시했지만 속은 많이 아팠다. 길에서 마주치는 아는 사람의 시선에 괜히 눈치 보고 의식하는 것은 열다섯의 내게서 벗어나질 못해서다.


웅크리지 말고 가슴 쭉 펴고 걸어야겠다. 지나온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남들의 평가가 어쨌든 간에.

혼자도 좋고 아이와 남편과 함께여도 좋을 것 같다. 걷는다는 것 자체로.

얼었던 땅이 녹아 부드러워졌듯이 계속 걷다 보면 내 마음 또한 언젠가 말랑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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