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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biana Jul 28. 2020

성추행? 경찰서 가시죠!

비행 에피소드

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코노미에서 열심히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레이오버 (저녁에 출발해서 일본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돌아오는 스케줄) 비행이다.
역시 만석이다.

짧은 비행시간에  많은 승객들에게 식사를 드리고 티 커피를 서비스를 하고 식사 트레이를 회수하고.. 기내 면세품 판매까지 하고 나면 비행기 온도가 높은 것인지 나만 이렇게 더운 것인지 갈증이 폭발한다. 하지만 시원한 물 한잔 마실 새 없이 바쁜 숨을 고를 즈음이면 어느덧 땅이 가까워온다.
서둘러 착륙 준비를 하고 점프싯에 앉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런 바쁜 와중에 팀장님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았다. 통상 상위 클래스 서비스를 담당하는 팀장님이 짧은 일본 비행에서 이코노미까지 오시기 쉽지 않은데
어쩐 일인지 뒤쪽 갤리에서 일본 남자 승객과 이코노미에서 서비스했던 A 선배님과 함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알고 보니 식사 서비스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일본인 승객이 A선배님의 엉덩이를 만지며 추행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다 함께  낄낄대며 좋아하니 비행기 내에서 이게 무슨 얼토당토 하지  않은 행동인지!
수치심을 느꼈던 A선배님은 서비스가 끝나자마자 팀장님께 보고를 했고 보고를 받은 즉시 팀장님은 이코노미 클래스로 달려오신 것이었다.
성추행을 했던 당사자를 비롯한 열명 남짓의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 운동부 학생이었고 인솔자는 운동부 감독 선생님이었다.  팀장님은 학생들의 인솔자인 감독과 성추행을 했던 학생 승객을 곧바로 777 항공기 후방 갤리로 불러서 그 사실을 확인했고 해당 학생은 의외로 순순히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변에 꽤 많은 목격자 승객이 계셨으니 마땅히 발뺌할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팀장님은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경찰 조사가 진행되도록 신속하게 조치를 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혹시라도 가해 학생이 아직 어리다 보니 지레 겁을 먹고 착륙 후 우발적으로 항공기 출입문을 자의로 열고 도주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후방 도어를 확실히 지킬 것을 특별히 요청하셨다.
비행기에서 성추행이라니! 나는 주니어였고 아주 어렸던 그 당시 그런 사건도 처음이었으니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후방 출입문만큼은 기필코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한편으로 작은 체구의 여자 팀장님께서 짧은 시간에 단호하고 일사불란하게 일 처리를 하시는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멋진 슈퍼우먼이셨다. 작은 거인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겠지.
다행히 도착 후 특별한 돌발행동 없이 가해 학생은 경찰에 인계되었고 우리는 출국 심사를 마치고 일본땅을 밟았다.


씁쓸하고 어두운 공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몰아갔다.
우리 승무원을 태운 버스도 서둘러 그 길을 따라 호텔로 향했다.
방을 배정받은 승무원들은 삼삼오오 방으로 이동했고 방에 들어온 나는 그 후의 일이 궁금했지만 경찰 조사가 잘 이루어지겠거니 하는 짧은 생각을 끝으로 짧고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며 단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은 유난히 짧았다.  




어느덧 아침인가. 창문 밖의 어둑한 군청색 새벽바람을 타고 전화벨이 울린다.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지정된 wake up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이상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오늘따라 wake up  call 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며 다 뜨지 못한 눈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자 예상했던 호텔 직원의 wake up call이 아닌 팀장님이셨다.
"준비하시고 크루 라운지로 30분 일찍 나오세요."
“아 네! 팀장님 서둘러 나가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짬밥도 안 되는 주니어라 밑도 끝도 없이 일찍 나오라고 하시는 팀장님 말씀에 용수철처럼 벌떡 튕겨져 일어나 신속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팀장님이 말씀하신 시간에 맞춰 크루 라운지로 향했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놀랍게도 어제 탑승했던 고등학생 운동선수들과 지도 교사가 우리보다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팀장님과 A선배님 그리고 함께 왔던 모든 승무원이 모였다.
알고 보니 우리가 세상모르게 꿀잠 자는 사이 팀장님과  A선배님은 경찰서에 가서 잠도 못 주무시고 조사를 받으셨다고 했다. 항공기 내 승무원 성희롱은 범죄이니  아무리 본국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죄는 덮어 줄 수 없었을 것이고 죄에 따르는 처벌은 당연한 조치였겠지만 A선배님은 그런 처분은 원치 않으셨다. 선배님도 그 또래의 남동생이 있다고 했고 동생 같은 남학생을 처벌을 하는 것보다 모든 승무들 원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것이었다.

크루 라운지에 모인 승무원들이 벽을 등지고 일렬로 섰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운동선수 학생 단체가 일렬로 섰다.
지도 교사가 먼저 무릎을 꿇었고 학생들이 일제히 따라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고개를 푹 숙인 지도 교사가 피해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선창 하니 학생들 역시 입을 맞춰 피해를 끼쳐 죄송하다고 외치며 머리를 더 깊게 숙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하겠다는 지도 교사의 사죄를 끝으로  무릎  꿇은 그들을 뒤로하고 크루 라운지를 나섰다.
통쾌했다. 내가 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동료이자 선배의 일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대충 넘기지 않고 밤잠을 반납하면서까지 현명하게 해결해주신 팀장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차분함 속에 결단력 있으시고 현명하시고 합리 적시며 아주 잘 나가시는 훌륭하신 분이시다. )





시대는 변했다. 비행기에서의 성추행도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하는 시대다. 하물며 잔혹한 과거사에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은 없고 그깟 돈 몇 푼으로 만행을 덮으려는 시대착오적 역발상을 하는 그들의  뇌구조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본인이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날의 지도 교사처럼 잘못을 인정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라 믿지만 분명한 것은
비수는 돌고 돌아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그들의 가슴에 꽃힐날이 분명 온다는 것이다.

아직  받지 못한 그들의 진심 어린 사죄를 강력히 요구하며 오래된  일본에서의 통쾌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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