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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녀의 서재 Sep 29. 2020

어른의 연애.

늙수그레 공시생의 소설

가뿐하다. '늘 한가위만 같아라' 광고에 나오는 그 말이 그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고향에 가는 마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제 가문의 종손으로(?) 이보다 더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두들 부러워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같은 사무실에 공무원 아내를 얻었다. 게다가 올해 승진도 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오빠, 오늘 시장에 들렀다 가자."

그의 귀여운 아내는 자기도 아줌마 놀이가 하고 싶다며 그를 졸랐다.

"그냥 마트로 가자. 추석이라 사람도 많고, 너 힘들어서 안돼. 편하게 장 보자. 그리고 마트에서 초밥도 사자."

그의 귀여운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알뜰하기까지 한 와이프가 더 귀여웠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다. 그의 귀여운 아내는 빽바지에 흙탕물이 튀겼다고 징징거렸다. 손수레 바퀴에 나이키 슬리퍼가 밟혔다고 속상해했다. 그는 시장에 온 지 30분도 못되어 피곤함을 느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아줌마의 가방을 열고 있다. 아줌마는 손에 든 계란에 정신이 팔려 자기 지갑을 가져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공직자의 사명감과, 만기 전역한 육군 병장으로서의 자존감으로 충만해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소매치기다. 아줌마. 소매치기!"

남자는 그의 고성에 놀라 달아났고 그 아줌마는 놀라 멍청히 서있었다.

 

"저... 괜찮으세요? 지갑은요?"

"아... 고맙습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지갑은 아직 여기 있네요. 고맙습니다."


그와 그 아줌마는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눈. 그 눈빛.

그녀였다!

그녀도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감사합니다."

그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는 추석명절 내내 멍했다. TV 화면에도 그녀의 눈빛이 아른거렸고 귀여운 아내의 얼굴에서도 그녀가 오버랩되었다. 더 야윈 것 같았다. 시장에서 손수레를 끌고 계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다른 여자들이 핸드백을 들고 다닐 때 커다란 쌕을 메고 검은색 슬랙스에 운동화를 고집하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그는 가슴이 아렸다. 그녀와의 강렬한 만남이 남긴 그 감정의 동요가 잦아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명절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변해있었다. 말수가 줄었고 슬퍼 보였다.




'이제 그녀는 만날 수 없다. 이제 그만. 그만하자.'


부장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다. 그는 옷을 가다듬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다 모였나? 이번에 새로 임용된 이사무관이야. TF장을 맡게 되었어요. 훌륭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아주 기대가 커요. 김주무관. 이사무관한테 브리핑하고 많이 도와줘요"

"경채로 새로 임용된 이사무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줄무늬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그리고 하얀색 아디다스 운동화. 손에 들고 있는 쌕.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장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오름! 그의 심장이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다!'






"아! 이래야 되는 건데. 이게 내 얘기면 얼마나 좋아. 요즘 글빨 좀 받는 것 같은데.... 소설로 전향을 해?!"

그녀는 컴퓨터를 끄고 덮어두었던 책을 편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말한다.

"야! 공무원 시험이란 시험은 죄 다 떨어져 놓고 무슨 공부야. 얼른 앞치마나 입어. 전 부쳐야지. 니 오빠네 내일 온단다."

"아 진짜 내일 모레 오라고 그래!"


언젠가....

그녀의 소설이 현실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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