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Jun 05. 2023

모르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

<20년 차>     

자, 들어봐.

푹 찌는 여름 냄새

낯선 곳 새벽길

길어지는 여행

며칠째 내리는 비

혼자서 보는 슴슴한 영화

침대 위에 쌓아두는 책

두 시간쯤 걸리는 청소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시간

나누기, 몽땅 나누어 비우기

먹고 싶은 것 잔뜩 쟁여놓고 마음껏 배고프기

무엇도 죽이지 않는 초록초록 식탁

소소한 잘난 척     

와,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것들 목록?

아니, 내가 완전 좋아하는 것들 목록이야... 여보!          


 가영에게     

 너의 글 잘 읽었어. 역시 글 참 잘 써!

처음 읽을 땐 그냥 웃음이 나더라. 가볍게, 피식. 

그런데 몇 번 다시 다시 읽다 보니 오히려 좀 슬퍼졌어.

‘20년 차’라는 제목부터 너무 민망해. 아니지, 연애 기간까지 하면 우린 25년 차.

가영 곁에 가장 가까이, 가장 긴 시간 머물러 있던 사람이 나일 텐데,

난 가영에 대해 정말이지 아는 게 없더라. 

나열된 것들이 하나같이 생소해. ‘이런 걸 좋아한다고? 누가?’       


 지난번 너의 생일날, 네가 내 선물을 받고 울었잖아.

감동받아 우는 널 상상했는데 어찌나 서운하고 난처하든지.

나 그거 준비한다고 며칠을 사이트 뒤져서 가장 화사한 비누꽃다발로 주문하고,

신권까지 준비해 거기 한 송이 한 송이마다 비닐에 꽂느라 진짜 시간 많이 썼거든.

선물을 받은 넌 꽤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있었어. 

조금씩 울다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또 울다가 눈만 끔벅이다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 앉아 있던 나를 보며 네가 말했지. “미안해.”

난, “괜찮아.”라고 했던 거 같고.

인제 그만 밥 먹으러 나가자며 일어서던 네가 한 마디 덧붙였어.

“오빠... 나 이런 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걸... 오빠가 몰라서, 

너무나 한결같이 몰라줘서... 그게 슬퍼.”

너의 말에 어째야 할지 몰라서 난 웃었고, 그럼,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거 먹자고 했지.

이후에 넌 ‘어떻게든 추스르고 담아야 하는 너의 슬픔과 그런 너에게 보인 나의 웃음’이 

내내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만 슬퍼진다고 했어.


 돌아보면 늘 그랬던 거 같아. 

내가 야심 차게 뭔가를 준비하면 가영의 반응은 늘 미지근했어.

그리고 이야기했지. “힘들었겠다, 그런데 다음번에는 이런 거 제발 하지 말아 줘. 

난 오빠가 나를 생각하며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준다면 그게 제일 기쁜 선물일 거 같아. 

너를 위한 이벤트를 곁에서 보고 듣는 다른 사람들은 내가 너를 얼마나 위해주는지 다 아는데, 나 같은 남편 없다며 칭찬하는데 늘 가영이만 몰라주니 답답하고 속상했지. 

너의 기준에 맞추는 일은 너무 힘들고 어쩌면 내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런데 가영아, 너의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올랐어.

“오빠 나는 꽃이 정말 좋아. 그런데 너무 대놓고 ‘내가 꽃이요!’하고 얼굴 내미는 꽃보다는 하늘하늘 들꽃 같은 꽃이 좋아. 내가 꽃이라면 그런 꽃이었으면 좋겠어. 그런 꽃을 신문지나 소포지에 무심히 만 꽃다발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쁜지 몰라.” 

“이 꽃다발 좀 봐. 이런 꽃다발은 꽃을 사는 건지 포장지를 사는 건지 정말 모르겠지 않아? 이게 다 쓰레기가 될 텐데... 굳이 돈을 주고 왜 쓰레기를 사서 그걸 선물로 주니... 난 이런 거 정말 이해가 안 가.”  

“오늘 퇴근길에 날 위한 선물로 꽃을 샀어. 응, 이게 다야. 이만큼이면 돼. 충분해. 일주일은 이 꽃 때문에 행복할 거 같아.”

꽃 하나를 두고도 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더라. 

여행이면 여행, 책이면 책, 음악, 영화, 음식... 좋아하는 풍경, 냄새, 느낌, 소리...

사람, 여성, 지구... 관계에 대한 너의 생각과 고민들... 내내 가슴속에 담고만 있는 슬픔까지도... 아! 네가 생각하는 (듣는 내내 얼굴이 뜨거워졌던) 섹스에 대한 이야기까지...

너의 시 첫 줄처럼 넌 늘 너를 들려주는 사람이었어.

그때마다 듣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였는데, 그 많은 ‘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굳이 말한 적 없는 나의 취향까지, 어떤 때는 나보다 더 잘 아는 너인데.

‘난 너를 모른다.’ 이게 내가 너에 대해 정확히 아는 한 가지네.     


 “그거 알아? 옆에 또렷이 사람이 있는 데 느끼는 외로움은 또렷이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보다 몇 배는 지독해.” 어디로 흘려버렸는지도 몰랐던 너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거 같아.

가영아, 나 어쩌면 좋니? 

가능만 하다면 비누꽃다발을 네게 주는 나를 흠씬 패주고 싶어.

슬픈 널 웃음으로 지워버리는 나를 있는 힘껏 걷어차 버리고 싶어.

내가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일까? 

여전히 너무나 깊은 혼란 속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늘 내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가영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곤 했는데. 

나 정말 어쩌면 좋니, 가영아.     


2023년 2월 19일

25년째 너를 모르는 너의 연인, 봉.     

작가의 이전글 그들이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