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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Jun 18. 2023

애인 있어요

 새 애인이 생겼다. 지난 애인보다 나이가 있는 편이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많이 어리다. 결혼 전 연애를 거의 중독적으로 하던 시절, 나보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적은 상대에게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기울여지지 않았었다. 서로 즐겁게 만나다가도 관계가 깊어진다 싶으면 늘 그의 ‘나이 어림’이 문제가 되었다. 귀엽게 보이던 말투나 행동들이 하나둘 눈에 거슬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전까지 너무나 멀쩡하던 그는 어느새 깊이 있는 대화가 어렵고 진지함이 부족하고 매사에 미숙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역시 어린 사람은 나랑 안 맞아!’ 어린 애인과의 관계는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쉽게 종료되었다.  

 자연스럽게 다섯 살 연상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한 나는 요즘 어려도 한참은 어린 상대에게만 끌린다. 최근 내 애인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남편을 포함한 ‘중년, 노년 남성’에는 전혀 끌림(조금 더 정확하게는 ‘꼴림’)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로 ‘어린 남성’ 또는 사회적으로 남성성에 가깝다고 보이는 생물학적 여성에게도 종종 끌린다.     


 그를 처음 본 건 몇 년 전이다. ‘잘 생김’이 뚝뚝 떨어지는 외모들에 살짝 질린 타이밍이었다. 평범한 듯 묘하게 눈길이 가고 순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으면 그야말로 시골 배경 애니메이션에 나올듯한 ‘나 착해, 원래 착해, 끝까지 착해!’ 캐릭터가 되었다. 그런 소년 소년 한 외모를 가진 그에게 엄청난 반전 매력이 있었으니, 그건 젠틀하면서도 한껏 다정한 말투, 중저음의 편안-한 목소리, 진지함 속에 양념처럼 톡톡 튀는 유머러스함이었다. 그를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없이 빠져들었지만, 그 때 마침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다른 애인이 있던 상황이라 감정을 더 이상 깊게 진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지난번에 이루지 못한 감정까지 한 번에 풀어내기라도 하듯 그야말로 순식간에, 완전, 옴팡, 풍덩 빠져버린 것이다. ‘하아... 얼른 또 보고 싶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 시간에 만난다. 다른 요일에도 내가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정해진 날 아니면 만날 수 없었는데 요즘은 그런 면에서 참 좋은 세상이다) 다른 요일까지 욕심내다 보면 나의 일상이 너무 흐트러질 것도 같고, 또 너무 격하게 빠져 허우적거리다 어느 순간에 훅 질려버렸던 경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 정해진 요일에만 만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헤어질 무렵 그는 몹시 난처하고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었다. 주로 그런 상황들은 헤어질 때 발생하곤 한다. 좀 더 오래 그의 곁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결국 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고, 저녁이 되어서야 그가 상황을 침착하게 잘 풀어냈다는 것, 심지어 그는 미리 그런 상황이 될 것까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 순수한 얼굴을 해가지고 너무나 지혜롭고 심지어 대범하기까지 한 그, 매력이 좔좔 흐르는 나의 새 애인.


“여보, 나 연애하고 싶어.”

“응... 그러면... 다시 태어나.”

몇 해 전 남편과 산책하다 나눈 대화. 

자려고 누우면 동그라니 떠올라 밤새도록 어울렁더울렁 잠을 설치고, 시도 때도 없이 설레다가 여기저기가 간지러워 웃음 나고, 열이 나듯 뜨거워지다가 이유 없이 콕콕 쑤시고 그게 또 싫지는 않고, 오늘은 좋아죽겠다가 내일은 나만 더 좋아하나 싶어서 미워죽겠고 또 다음 날은 더더더 좋아죽겠는 그런, 연애를 난 현생에서는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니. 그러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 나도 남편도 농담 삼아 나눈 대화지만 어쩐지 씁쓸했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나의 연애 전적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친구들일수록 축하보다 앞서 조심스럽게 걱정의 말을 했다. 별나도록 부지런한 나의 연애 세포가 결혼과 함께 저 깊고 깊은 지하 감옥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영영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었다. “당연하지!” 결혼 앞에서 나는 쿨하게 연애세포와 안녕을 고했고 얼마안가 결혼을 했다. 남편과는 평생 ‘연애하듯’ 살자며 손가락 걸고 도장을 찍었다. 


 낙.장.불.입!! 핑크빛 어리석음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유부녀가 되어있었다. ‘연애하듯’은 개뿔, 남편과는 결혼만 하는 거지 연애는 하는 거 아니다(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 육아의 시간을 지나면 성욕과 더불어 연애 욕구도 자연스럽게 소멸 되는 줄 알았지만 반백살 살고 보니 모두가 그런 거 아니고 그게 ‘자연스러운’ 건 더더욱 아니다. 자연스러운 소멸은 한참 멀었는데 자꾸만 세상이 나서서 지우려 하더라. 나이가 들수록, 여성일수록, 더욱더 철저히 지우며 살기를 요구받다 보니 나 같이 ‘나이 든 여성’의 성욕이나 연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성 스스로도 없는 취급 한다. 그게 ‘서로’ 편하다니까. 그렇지만 없는 취급한다고 있는 것이 없어질 수는 없다. 자주 들여다봐 주지 않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우리 안에 분명히, 여전히, 팔딱팔딱 존재하고 있다. 다행히.      


 나의 욕망을 들여다본 이후 지금까지 연애하고 싶은 내 마음은 쭈욱 유지되고 있다. 남편 말처럼 다시 태어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난 나름의 방법으로 때론 공공연하게, 때론 조심조심 몰래몰래 혼자만의 연애를 한다. 얼마 전에는 짧은 소설을 써서 그간 빠져있던 누군가를 은밀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 소설을 가장 먼저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글방에 있다고?”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고백에 살짝 당황하는 듯싶더니 글을 다 읽고 나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응원까지 한다. 그간 공개한 나의 연애처럼 열정 넘치는 관음의 방식으로 절절히 사랑을 하다 또 다른 애인으로 넘어가겠거니 생각하는 듯하다. 나의 연애를 위해 가족의 인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이나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중간 중간 나의 연애상황을 공유하며 ‘나이든 여자’인 당신의 아내, 너희들의 엄마에게도 여전히 성욕이나 연애 욕구가 존재한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굳이 알림 한다. 가까운 당신부터 내 욕망을 좀 알아 달라고, 모른 척 지우려 들지 말라고, 그런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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