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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물 Oct 03. 2021

「요즘 하루」 (적재)

주절주절 음악 13

요즘 하루 (적재) : https://youtu.be/0QY_lHBOiTA

미안해요, 박보검 노래인 줄 알았어요.


「별 보러 가자」라는 노래로 적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영락없이 박보검 노래인 줄 알았다. 음원까지 떡하니 나와 있다 보니, 박보검 씨가 이참에 데뷔를 하려나보다 했다. (적재님도 "박보검 덕 많이 봤다."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이후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적재는 가수이기에 앞서 기인이라는 인상이었다. 아니, 기타를 어떻게 저렇게 쉽게 치는 거야.


각설하고, 적재의 노래를 듣다 보면 이따금 부끄러워질 때가 종종 있다. 강렬한 비유도, 치렁치렁한 수사도 없는 밍숭한 일상어로 이루어진 말들이 감추고 싶은 나의 못난 마음, 투정과 회의, 몽니를 끄집어내어 전시해버리기 때문이다. 「FINE」이 그랬고,「개인주의」가 그랬고, 「요즘 하루」가 또 그렇다. 분명 사소하고 좀스러워서 남에게 고민거리랍시고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 거치적 거리다가 이내 하루의 기분을 지배해버리는 그런 생각과 감정들을, 마치 세밀하고 복잡한 감정도 한 단어로 표현해버리는 독일어 어휘처럼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적재의 노래이다.


「요즘 하루」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걸까?' 홀로 우울이나 자학과 싸우는 날이면 늘 자문하게 되는 말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에 대한 정답 같은 말을 듣곤 한다. '야, 다 그러고 사는 거야.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그 정답에 우리는 진저리를 친다. 질문에 대한 적확한 대답이야 되겠지만은, 그 말은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통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니까. 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 안에서는 결국 남들은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게 되는 이 심리는 무엇일까. 어쩌면 '다들 이러고 사는 걸까?'라는 질문은 누구라도 나를 좀 건져 달라는, 일종의 수사 의문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나저나 큰일이다. 이제는 슬슬 부모님이 나의 사회성을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한다.

지난주, 참으로 오래간만에 생긴 점심 약속을 나가는 길. 얼마만에 약속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족히 한 달은 사람을 만날 목적으로 외출을 한 일이 없지 싶었다. 시간이 그래 참 덧없이도 흐른다 싶으면서도 이제 더는 나의 반사회적 성향을 맨 바이러스의 탓으로 떠넘길 순 없겠구나 통감한다. 9월은 분명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었다. 해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새로운 계절의 시작, 또 새 학기의 시작, 백신 접종. 그리고 생각보다 변한 건 없다. 날씨는 여전히 미적지근하고, 새 학기에도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며, 백신은 두 번이나 맞았지만 항체가 생긴 것이 몸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대로 이어지는 나날.


여름방학부터 지난하게 이어져온 나의 인간관계 태업, 혹은 파업도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그야 9월은 백신이니 추석이니 다른 핑계가 많았지만 개강하면서 친구와 나눴던 '그래, 한 번 보자'라는 인사말이 아직까지도 공허한 빈 말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곱씹다 보면 뭐가 그리도 바쁘셨나, 자문하게 된다. 바쁘기로서니 얼굴 한 번 볼 짬이 없을까? 명분도, 목적도, 이유도 없는 나의 파업은 관성으로 지속되고 무기력은 생각보다 안락해서 털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사람이 무감해진다. 감상이 감각보다 두어 발짝 느리게 찾아오는 때가 많다. 한참 창밖을 내다보다가 뒤늦게야 '오늘 날씨가 좋구나'하고 깨닫는 식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단편적인 감상들도 언어화되지 않고 될 필요도 없으니 문서의 임시 저장 기능처럼 고작 며칠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이렇듯 무감해진 사람에게 남는 감상은 '재미'뿐이다. 상쾌함, 설렘, 들뜸, 나른함, 여유 따위의 여러 감정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지고 그저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만을 따져서 재미있는 것을 따라가게 된다. 말초적인 재미만을 좇다 보면 근육이 죄다 빠져버린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게 된다. 요새는 손가락만 까딱 내리면 입으로 푹 떠먹여 주는 말초적인 재미들이 널려 있고 우리가 할 일이라곤 더 소화시킬 것도 없어 보이는 그걸 입으로 받아 넘기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다지도 편한 생활에 비해 사람과의 만남은 지나치게 다채롭고 복잡해 보이기만 한다. 안 해본 일도 아닌데 그것은 난생처음 입에 대보는 식재료처럼 두렵게만 느껴지고 인간관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이랄 것들도 버겁기만 하다. 목전까지 들어찬 이런 기분에 대처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애써 무시하고 미루는 것이다. 되는 대로 하는 거지, 라는 손쉬운 변명과 함께 다시 재밌는 일에 코를 박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태업이고 파업이다. 말했다시피 명분도,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다분히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이놈의 파업은 당최 누구와의 협상을 타결시켜야 끝을 낼 수 있는 걸까. 무기력에 젖은 나와의 협상은 요원해만 보인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다들 어떻게 지내시나요. 다들 이러고 사는 건가요. 누구라도 나를 건져 올려줄까 내심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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