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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레저 Jan 09. 2023

우리 동거할까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결혼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찾으면 나와 결혼을 생각하는 그에게,


우리 동거할까요?




프랑스인들은 자유분방하고 결혼을 잘하지 않고 만나서 좋으면 가볍게 동거부터 시작하고, 그러다 또 맘에 안 맞으면 바로 헤어지고,,, 사랑에 대해 무척이나 가볍고 쉬운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들과 어울리며 지내다 보니 생각보다 사랑과 이별, 만남과 헤어짐에 진중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을 보며 프랑스인들의 동거문화에는 그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사회적 질서와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내 주위에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는 동거 커플들이 꽤 있다. 결혼 아닌 동거만으로도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커플로서의 롱런하는 삶을 이어나가는 프랑스인들의 심플하고도 미니멀한 사랑 방식을 보며 꼭 결혼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1. 프랑스인들의 동거문화


프랑스에는 동거라는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팍스 PACS(시민 연대 계약 Pacte civil de solidarité)라는 제도가 있다. 원래는 동성 부부의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제도이지만 현재는 이성 커플들이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심플한 동거 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팍스의 가장 큰 장점은 절차가 무엇보다 간소하다는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후 시청이나 공증인에게 공증을 받으면 된다. 그리고 세금과 사회보장(병원비, 자녀출산과 양육 보조금등)을 받을 수 있는 등 결혼했을 경우와 거의 동등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임신부터 출산, 자녀 양육까지 다양한 사회보장을 인정해주는 팍스로 인해 저조했던 프랑스 출산율이 증가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동거문화에서 눈길이 갔던 것은 각자의 수입은 서로 알아서 관리한다는 것이다. 단순 동거이든 팍스이든 (결혼한 사람들도 포함해서) 대부분 자신들의 수입은 직접 관리하고 공동 계좌를 열어 생활비와 바캉스 비용, 그리고 기타 공동으로 지출해야 하는 부분을 따로 떼어 함께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팍스의 경우에는 결혼과 비슷한 채무 연대화가 있어 동거생활동안 생긴 채무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고 상대 동거인의 빚에 대해 상환의무가 지워진다.


결혼과 팍스의 가장 큰 차이를 말한다면 그건 바로 헤어질 때 정말 간단하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처럼 두 사람의 합의도 필요 없이 한쪽에서 팍스를 종료해도 해지가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함께 살았던 이를 자동으로 내 인생에서 로그아웃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경우를 당하면 진짜 황당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예의 없이 안하무인으로 헤어지는 커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내 주위 동거커플은 대부분이 잘 지내고 있으므로) 결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동거문화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진 프랑스인들에게 팍스는 결혼하지 않고도 함께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아직도 동거 중인 필립과 아멍딘


필립과 아멍딘은 첫째 키위군이 유치원을 가게 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같은 유치원 학부모 사이에서 동네 친구가 된 사이였다. 이 들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으로 십 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부부였다. 그렇게 같이 생활하면서 아파트도 공동명의로 사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동거관계를 유지하는 그들 커플이 처음에는 내 눈에는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자녀 양육문제나 노후문제등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게 살 거면 차라리 이제라도 결혼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도 필립과 아멍딘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프리카로 가면서 잠시 세를 주었던 우리 아파트로 올여름 다시 들어왔다. 거의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필립과 아멍딘은 여전할까? (그들 커플이 잘 지내고 있을지 헤어졌을지 궁금하기는 했다.)


다시 보게 된 필립과 아멍딘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동거상태로 생활을 하는 그들 커플을 보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이루어지는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그들 커플에게는 정말로 의미 없는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3. 우리의 동거문화


요즘 미디어를 통해 보면 우리들의 결혼관도 예전과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부쩍 비혼주의와 이혼에 관한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동거'에 관해서는 예전보다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라고는 하나,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젊은 세대조차도 여전히 조심스럽고 사랑해서 그냥 함께하는 단순동거뿐만 아니라 결혼을 전제로 하는 동거에 대해서도 지지보다는 말리는? 것이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인 것 같다.(내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인들 스스로도 동거했다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오게 될 정신적 고통과 후에 어쩌면 동거인과 헤어지고 다른 배우자나 더 사랑하는 이를 만날 경우 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까 봐(혹은 상대방이 이해를 못 할까 봐,,,) 또는 결혼을 생각했는데 동거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 관계가 깨질까 봐,,, 하는 여러 이유로 선뜻 동거를 할 용기를 못 내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많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동거 경험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곱지 않은 시선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인이 되면 대부분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는 프랑스인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정서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서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남에게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동거문화가 뿌리내려지려면 성숙한 사회 시선과 동거관계를 보호하는 사회적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연애는 눈을 멀게 하고 동거는 시력을 밝게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연애하는 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사소한 것들이 동거하는 동안 드러났다.

물론 그가 꺼내지 않아 상상도 못 했던 성격이 숨어 있었긴 했지만('결혼을 미친 짓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를 읽으신 독자분들은 아시리라) 


그렇게 우리의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함께 하면서 연애하면서 보지 못했던 그의 좋은 면과 안 좋은(내 기준으로 나와 맞지 않는) 면들을 보았다. 군인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자기 주위를 단정하게 정리 정돈하고 식사 때가 되면 혼자 때로는 나와 같이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마음의 평온함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결혼이라는 것을 결정할 만큼 나는 어리지 않았다. 첫사랑과 꿈꿨던 결혼생활이 드라마에 나오는 상상의 것이었다면, 그 상상이 깨진 그때의 나에게 결혼은 현실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연애기간 동안은 볼 수 없었던 그의 내면의 모습과 삶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와 결혼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와 결혼을 생각 중이라는 내 말에 처음에는 미쳤다고 화를 내셨던 엄마가 설득 모드로 나를 달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그중 한 말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생각 중이라는 것은 너도 확신이 없다는 거지, 돈 없이 살아갈 용기가, 그럴 자신이 없다는 거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너만 또 아플 거야,,, 빨리 정리하고 들어와...



나는 정말 자신이 없던 걸까?



다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의 경제력이 얼마나 되고, 학력이 어느 정도이고,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아빠처럼 바람이 날지 안 날지 하는 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별의별 상상까지)


하지만 내 남자의 경제적 능력이나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의 크기는 내 의지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가 현재 지닌 것들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질지는 솔직히 그도 나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저 내 마음이 원하는 데로 내가 선택하고 그 선택한 길을 잘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결심했다.


그와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흔들림이 없었다. 주위의 시선이나 말에 많은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지나온 사랑을 인정해 주었고 현재의 내 마음이 그에게로 향한다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를 믿었고 우리의 사랑을 믿었다.


그렇게 흔들림 없는 사람이라면 함께 해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연애만 했다면 어쩌면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나를 믿고 존중해 준다는 것이고 나 역시 그는 내가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의 짧은 동거생활은 그렇게 서로를 더 밝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 되었고, 나는 그의 인생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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