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로 다섯 식구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어요. 가까운 일본이었지만 나리타 공항에서 니가타현까지 버스로 다섯 시간 이상을 가야 했답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아이들은 여행 가기 전부터 즐거워하는 기색이 가득한데 제게 아주 갑자기 30대를 보낸 시간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더라고요. 살면서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저는 그저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반나절을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서 짐을 싸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 겉돌 뿐, 새벽 비행기가 뜨기 전 몇 시간 전에 가방을 챙겼답니다.
억울한 기분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삼십 대 후반에 혹독하게 저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을 때 이미 많은 것을 토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아마 또 몇 차례 그런 방황이나 혼돈이 찾아올 테지만 이번에는 '떠남'이 주는 약간의 설렘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표면적으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의 미소를 보면서 저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행을 가면서 딱 한 권의 책을 가져갔어요. 바로 최인아 대표의 책인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였지요. 여행 스케줄은 다행히 전적으로 맡길 수 있었던 상황이라 어쩌면 낯선 도로 위에서 얻은 길다면 시간 동안 진짜 독서를 아주 오랜만에 할 수 있었을지도요. 그 한 권의 책 속에 많은 것들이 녹아있었지만 저는 딱 한 문장이 들어왔어요. 그것은 바로 "출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문제를 명확히 화는 과정입니다. 머릿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이 한데 뭉쳐 뭐가 뭔지 선명하지 않던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출력 괴정이죠.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듣는 이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실은 스스로 문제를 객관화하는 과정입니다. -p. 243 '스스로 문제를 객관화하는 과정' 중에서
자기 의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있지요. 여행을 떠나기 딱 하루 전이 바로 제게는 그런 날이었어요.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 갑자기 훅 찾아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여행을 미묘한 감정선에서 출발하고 일상에서 떨어져 보내는 그 며칠 사이에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여행지에서는 사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글을 쓸 조건도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기운이 충전된 상태에서 펜을 들고 노트에 제가 생각하는 출력과정을 한 페이지에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제가 왜 살고 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여행한 후에 중 1이 된 첫째가 만든 가족단톡방에 올려진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첫째와 남편이 한 방을 쓰고 저랑 둘째 그리고 셋째가 다른 방을 잡았는데요. 첫째는 일본에서도 매일 스스로 숙제를 하고 기록을 남겼더군요. 이번 여행에서 저는 짐 챙기는 것도 겨우 했기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과제들을 전혀 챙기지 못했거든요. 아, 둘째가 자기 가방 속에 흔한 남매 한 권을 넣어왔네요. 다시 첫째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은 '일상의 힘'이었어요. 너무 뻔한가요.^^
하지만 제가 사는 이유를 다시 상기해 보면 결국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이걸 돌아와서 글로 쓰기 전에는 또 이해를 못 해서 도착한 날, 다시 몇 시간을 누워있었어요. 제가 너무 답답해서 글로 적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어요. 여행을 다녀오느라 흐트러진 집안을 다시 반듯하게 정리하는 일.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집안정리는 하고 나서 오히려 에너지를 제게 주었답니다.
그리고 다시 저는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주섬주섬 꺼내고, 다시 계획을 세웠어요. 새로운 환경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경험하고 온 둘째는 일상 복귀 첫날 평소와 같이 숙제를 하는데 의자에 2시간 30분을 앉아있게 되었어요.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그리고 셋째도 마친가지로 누나의 책을 끝까지 함께 듣고는 자신의 몫을 단단히 해냈어요. 기대하지 않았던 여행이 주는 선물들이 또 한꺼번에 쏟아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