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이너리 Oct 17. 2022

#6 믿음

모든 길은 옳은 길이다.


자신이 믿는 대상이 아무리 실체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실체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도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한 남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 남자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믿음'이라는 것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온 뒤로는 끊임없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많았다.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믿음,  변화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믿음 등 한 가지로 특정되지 않고 여러 종류가 존재한다. 한 남자가 아프리카에서 소속된 단체의 경우 종교적인 '믿음'에 속했다.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하나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한 남자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다.     

한 남자가 그나마 믿음이라는 것을 갖기 시작한 건 군 시절에 읽었던 자기 계발 서적을 통해 얻게 된 '자신에 대한 믿음' 뿐이었다. 이도 어쩌면 자기 계발서라는 종교에 세뇌당한 상태였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믿는 교리의 핵심은 천지를 창조한 신이 있었고, 그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와 모든 인간의 죄를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주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을 받은 자‘라고 규정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 간다고 믿었으며 믿을 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뿐이며 자신을 믿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 여기고 사탄에게 유혹된 자라고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라고 떠들어대던 한 남자는 그들이 보기에 그 사회의 부적응자였고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한 인간에 불과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무인도에 표류가 된다거나 산속에 들어가 홀로 수행하며 살아가는 등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사회와 집단 안에 소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원들 간 합의된 기준을 따르며 살아간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라는 말이 있듯이 옳고 그름을 떠나 특정 사회와 집단에 속한 자는 그 사회에서 만들어진 기준이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기준을 따르며 살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자는 문제아, 패자자와 같은 낙인이 찍히고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사회 안에서 매장되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아프리카에서 소속된 사회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는 성경이라는 법을 따르며, 신을 숭배한다.

그들이 떠받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경우 그곳에서 평범하게 지내기 쉽지 않음을 의미했다.


 한 남자는 비록 믿음은 없을지라도 최대한 그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고, 그들이 듣기 불편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도 사회 안에서 그들과 함께 공감대를 공유하고 싶었고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으며 인정을 받고 싶은 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소외될까 봐 두렵기도 했었다.


 사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의 존재를 믿는척하는 것이었다.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의 희생을 통해 씻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 한마디면 됐다. 믿음을 검증할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한 남자는 ‘구원받은 자’가 될 것이고 그들은 한 남자를 자신들과 같은 하나님의 자식 이자 같은 곳을 항해하는 선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서 성과를 많이 내면 하나님이 일을 한 것이고 어쩌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믿음 문제를 운운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고, 성경과 하나님으로 하나가 되어 그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 치유하고  울고 웃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깨달음과 성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어 그들만의 견고한 연결고리를 보고 있을 때마다 소외감이 들기도 하면서, 그도 저들에게 동화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어쩌면 구원이란 걸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목사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성경도 몇 번이고 읽어 보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구원으로 이르지는 못했다.

   

 제 아무리 주변 모든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고 성경이 오직 진리라고 주입시켜도 한 남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며 신에 대한 근거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텍스트로만 남아있는데 그것을 보고 어떻게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 남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힘들고 열악한 아프리카 생활에서 의지할 곳이 필요하더라도, 그 집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부정하면서 오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더라도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항상 여지는 남겨두면서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말했다.

“신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라면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은 열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지켜가며 아프리카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궁금했다. 구원이라는 걸 받았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이 갑자기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한 남자처럼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했던 사람일수록 구원이란 걸 받게 되었을 때 그 믿음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자신도 만약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믿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저 사람들처럼 될까 궁금했다. 갑자기 다른 자아가 들어간 것 마냥 변해버린 그들을 보면서 그의 눈엔 그리 썩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뭔가 성령으로 가득 찬 평온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고 구원이란 걸 받은 자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 당연하듯이 교회 집안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당연한 모태신앙인 형제자매들을 제외하고 자신과 비슷하게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을 타깃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걸 믿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는데 구원받았다는 느낌이나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믿음이란 것이 갑자기 들어온 것이냐 아니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가?”


 믿음이 생기게 된 계기는 제각기 달랐다.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문뜩 믿어지기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데 기도를 하니까 문제가 해결되어서 믿기 시작했다는 등, 신의 존재를 믿게 된 계기는 사람마다 달랐지만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느낌은 대부분 공통적인 대답을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아무튼 그냥 믿어져요 그게 다 에요”


한 남자는 사실 구원이란 것이 들어올 때 뭔가 스위치가 켜지는 듯한 느낌, 감정이 요동치며 무언가 끌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 환희와 황홀감과 같은 감정들이 뒤섞인 느낌 등을 기대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믿어진다는 공통적인 대답에 조금은 실망했다.  그리고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데 강력한 무기가 필요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이용해서 인간 사회를 단결시키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인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으며, 종교라는 집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 사회의 소속되어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어떤 계기와 상황을 만나면서 그 믿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구원이라는 성스러운 축복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끊임없이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몇몇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의 행동과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정말 변해있었고, 변하고 있었다. 단지 믿음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도 말이다.

망나니로 살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살기 시작했고,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정서가 불안하고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던 사람이 온화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고, 대인기피증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던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간증을 하는 모습 등 그들이 변화된 다양한 사례를 직접 보면서 이런 용기와 변화 어떻게 갑자기 생기게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까지 변하게 만들었고 팔자에도 없던 아프리카까지 오게 만들었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다양한 지식을 배우면서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들은 성경으로부터 믿음을 만들어갔고 그 대상은 신이라는 존재였고, 한 남자는 자기 계발서로부터 믿음을 만들어갔고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믿음의 성질만 조금 다를 뿐 그들이나 한 남자나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믿음’이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한 남자가 그들이 믿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가 기대하는 미래 자신의 모습과 인생 또한 아직 존재하지도, 실체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을 뿐. 비록 한 남자라는 실체가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한 남자가 믿는 미래의 모습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믿는 신도 어쩌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에 대한 옳고 그름과 존재 유무가 아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진정성이었다.

자신이 믿는 대상이 아무리 실체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실체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도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믿음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내일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인간을 변화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믿음을 이렇게 비유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위에 시간이라는 배를 타고 선택이라는 노를 잡고 죽음이라는 종착지로 향하는 여정이지만 어느 누구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막연함과 두려움을 안고 망망대해 위를 정처 없이 그저 조류의 흐름에 따라 떠내려간다.


믿음은 드넓은 망망대해에서 등대가 되어주고 그 등대의 불빛이 향하는 곳으로 노를 저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인생은 각자 인생의 나침판이 되어주는 등대를 찾아 종착지로 향하는 여정이며, 모든 등대와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종착지에 도착하고 나서 각자가 판단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등대와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여정은 자신에게만큼은 옳은 것이다. 


그렇게 한 남자는 자신의 믿음을 유지한 채, 11개월이라는 아프리카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전 05화 #5 부족함을 인정한 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