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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너리 Oct 30. 2022

#10 깨달음

그곳엔 '내'가 있었다.

2020년 06월 18일 늦은 밤,

북한산 산책로를 서성이다 지쳐 아무도 없는 어느 쉼터에 앉아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30년 동안 철옹성 같이 무너지지 않았던 눈물샘이 터지다 못해 폭발해버렸다.

한 남자의 마음은 칠흑 같이 어둡기만 한데, 이런 그의 마음도 몰라 주듯 서울의 밤은 늦은 시간에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4.19 거리 인근 북한산 산책로에서 한 남자가』


4차 산업혁명 시대, 세상에 필요한 가치를 제공하고 영향력 있는 IT 회사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그의 모든 걸 걸며 밤낮과 주말 없이 열정을 불태웠던 창업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난 후, 그에게 남은 건 그저 초췌한 얼굴 위에 초점이 없이 퀭한 눈 그리고 지저분한 머리를 달고 있는 볼품없는 몸뚱이뿐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비친 세상은 형형색색의 빛을 띠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면서 잿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통장에 찍혀있는 잔고 3900원, 신용등급 8등급, 그리고 남아있는 대출금 1500만 원이 전부였다. 휴대폰비도 못 내서 끊긴 상황에 살고 있던 원룸은 그간 보증금으로 방값을 충당했는데 다음 달인 7월이면 남아있는 보증금이 다 없어져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업을 준비할 적에 그는 친구들과 부모님께 많은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더 이상 도움을 청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취업준비와 일일 알바나 막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아야 했지만 그의 삶은 이미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거의 두 달을 유튜브와 집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고로 팔만한 물건을 찾는 게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팔아치웠다. 모니터와 같은 전자기기부터 시작해서 커피포트, 옷장, 서랍 등 생활용품까지 죄다 팔아서 번 돈으로 담배와 컵라면을 사서 끼니를 해결했다. 심지어 지인에게 선물 받은 책까지 다 팔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살수록 인생이 점점 더 비참해지고 상황만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갈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럴 힘도 남지 않은 듯했다. 사지는 멀쩡했는데 그의 정신은 이미 죽어있었다. 그는 심각한 무기력에 시달렸고 이런 무기력이 지속되다 보니 우울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의미 없고 덫 없게 느껴졌다. 항상 에너지와 열정이 넘쳤던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폐인이 되어가는 그를 보고 걱정되어 달려온 친구들의 위로와 격려도, 그에게 힘을 준 자기 계발 서적과 각종 인문학 강의를 보아도, 더 이상 그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환멸감까지 느꼈다. 이 세상 무엇도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과 관계도 멀어지고 혼자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는 평소 IT, 열정, 사업 등과 같은 책을 읽고 영상을 소비해 왔지만 이 시기에는 우주와 양자역학, 뇌과학과 같이 존재와 인생에 대한 공허함과 허무함을 대변해줄 무언가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주를 보며 지구는 우주의 광활함 안에서 먼지만도 못한 작은 돌덩이일 뿐이고 이곳에 사는 우리의 인생은 우주 스케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합리화를 했고,


뇌과학을 보며 우리가 하는 정신과 마음은 단지 1.5kg짜리 두개골 안에 있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전기적/화학적 작용의 산물일 뿐,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돼지와 다를 게 별반 없는 의미 없는 존재이다’라는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으며,


양자역학에서는 인간, 동물 그리고 모든 사물과 우주 전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의 99.999999% 가 비어있는 즉, 대부분이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며,


어떻게든 실패한 그의 인생을, 비참한 자신의 인생을 이러한 삐뚤어진 생각들로 합리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정신과 육체 모두 흉물스러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시기 한 남자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는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그는 창문 사이로 쏘아대는 햇빛 때문에 맞이하기 싫었던 늦은 아침을 강제로 맞이했다. 그리곤 어김없이 담배와 라면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중고로 팔 물건을 찾고 있었다. 팔 물건은 거의 다 팔아서 무얼 팔지 고민하다가 그의 책상에 꽂힌 약 50권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인생을 바꿔준 책만큼은 다른 물건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 책들도 어차피 지금 현 상황에서는 의미 없이 느껴졌고 일단 끼니를 해결해야 했기에 책을 다 줄로 묶어서 중고 책방과 온라인 중고사이트에 팔았다.


막상 팔려고 보니 마음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다 팔고 나서 15만 원 정도 벌어서 그 씁쓸한 기분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라면으로 학대받은 자신의 몸뚱이를 위로해 주기 위해 그날 저녁 그가 좋아하던 편의점 점보 닭다리와 넓적다리를 사서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자주 가는 집 근처 북한산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두운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다가 지친 한 남자는 아무도 없는 쉼터에 앉아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서울 야경을 보면서 편의점 닭다리를 먹다가 그가 모르는 사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에는 그의 인생 영화였던 ‘미스터 노바디’의 슬픈 주제곡(Sous Les Draps)이 흘러나왔다. 휴대폰비를 못내 정지를 당했던 터라 음원 어플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감명받아 OST를 MP3로 모조리 다운로드하여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었다.

닭다리 하나를 다 먹어갈 즈음, 오랜만에 먹은 점보 닭다리가 너무 맛있어서 남은 하나는 아껴먹기 위해 조금씩 베어 먹고 있던 찰나,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 주위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하고 나서 다시 닭다리를 한입 씹는 순간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감정 제어장치가 상실한 것 마냥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울고 싶은 자아와 앞으로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이 이런 일 가지고 눈물은 나약하다는 생각을 가진 자아가 대립하기 시작했지만 그날은 울고 싶은 자아가 압도해버렸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콧물까지 흘려가며 펑펑 울었다. 그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도 이토록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강한 놈도 아니라는 걸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서럽게 울게 만든 건지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복합적인 감정이 쌓이고 쌓여 그날 한방에 터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도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평소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하며 힘들어했고, 비참한 생활에 몸과 마음은 지쳐갔으며, 어떻게든 그가 남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온 원대한 꿈들을 지켜내기 위해 빌빌 기면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현 상황에, 그리고 아직 자신의 그릇이 형편없이 작은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좌절했고, 그가 가진 꿈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음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민낯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 홀로 세상과 담을 쌓고 스스로 고립시켜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겁쟁이였고,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30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포장하려 애쓰며 살아왔던 인생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남에게 돋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닌 ‘나’ 다운 인생을 살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 답게 사는 건 무엇인가?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그는 눈물을 잠시 멈추고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역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할 수 있었고, 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던 주요 사건과 인물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줬던 성공한 위인들과 정신적 스승들의 음성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깊은 내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물었다.
"나다운 것과 나답게 사는 건 무엇이지?"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스티브 잡스도, 내가 되고 싶었던 일론 머스크도, 니체도, 영적 스승이었던 크리슈나무르티도, 그의 여러 정신적 스승들도, 그 어떤 사상과 이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곳엔 ‘내’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타인의 기준에 좋아 보이는 것들로 포장하며 행동해 오면서 가려지고 내면 깊은 곳에 쓸쓸히 내팽개쳐진 ‘그’가 있었다. 한 남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학습하고 생각하며 만들어진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니체도 아니고, 일론 머스크도 아니며, 스티브 잡스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이 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인생을 사는 법, 학습해야 하는 것, 행동해야 하는 것의 기준에 맞춰 살아왔던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자기 ‘자신’이 없었다는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 남자는 ‘나’ 다운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 답게 사는 건 권위자들과 사회에서 규정한 기준안에서 양육되어 나 자신을 잃고 사는 인생이 아닌, ‘나’ 다운 게 무엇이고 나만의 인생의 기준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여정을 떠날 용기가 있는 것, 그리고 사회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주체성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나’ 답게 사는 것이고, 앞으로 ‘나’ 다운 인생의 기준을 만들겠노라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흥건해진 쉼터 벤치에서 일어나 눈앞에 보이는 야경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어둡기만 한데 환하게 빛나는 저 짓궂기만 했던 저 도시의 야경이,

생각하나 조금씩 바꿨을 뿐인데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 멍하니 아름답게 변해가는 야경을 충분히 감상한 후 집으로 돌아가 무너질 대로 무너져버린 자신의 인생을 일으키려면 일단 뭐라도 해야 했기에 곧바로 취직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다.

우선 자신이 살고 있던 집 보증금을 거의 다 날리고 월세도 밀려있는 상태였기에 숙소가 제공되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곧바로 일할 수 있는 공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보증금으로 월세를 내고 집에 남은 물건들을 헐값에 중고로 팔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차비를 마련해서  7월 중순에 몸뚱이와 가방 하나만 딸랑 맨 채로 전북 구미에 내려와 스마트폰 카메라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공장으로 내려왔지만 '자신'이 간직했던 꿈과 '나'다움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나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것들로 채워갈 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그의 나이 서른, 인생의 변곡점에서 ‘나’ 다운 인생을 만들고 ‘나’ 다운 삶을 추구하게 된 시점이었다.


그 이후 그는 구미 공장에서 일하며 생활의 안정감을 다시 되찾고 공장 생활 8개월 차가 접어들 시점에, 다시 한번 일어서기 위해 고향 섬으로 내려가 그의 아버지 밑에서 문어 잡이 일을 도우면서 프로그래밍 공부를 독학으로 병행하다가 3-4개월 후에 개발자로 취업하여 또다시 경기도로 올라왔다. 

현재 개발자가 된 그는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히며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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