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avis and Johnnie Apr 01. 2023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사실 여기, 활개하는 '자유 의지'가 있다


  일상의 사소한 계기를 통해서 최근 가지게 된 깨달음이 있다. 

늦은 밤 알바를 하는 곳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함께 일하는 사람과 나란히 돌아오면서 예전에 치한이 나타나 따라온 적이 있어 이 길은 어두울 때 무섭다며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런 일이 있으셨냐고, 그래도 별 일은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엄마가 재미로 보는 이번 달 운세에서 내 것을 읽어주시며 늦은 밤 위험할 수 있으니 호신용 아이템을 지참하라 나와있다고 일러주셨다. 운세를 믿지 않는 나는 이번에도 역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켕기는 찜찜한 기분이 미묘하게 뒤끝을 남기자 문득 이런 발상이 떠올랐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게 위험을 경고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늘 주위 관계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하시니 이는 혹시 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이내 그로부터 나의 거대한 오류를 분별할 수 있었다.

나는 일찍이 한번도 어두운 밤, 한적한 곳을 합당한 이유도 없이 두려워한 적이 없다. 사람을 비합리적으로 의심하여 지레 겁을 먹은 적도 없다. 

나는 한적한 밤의 낭만을 좋아하고, 낯선 사람의 미스테리함을 좋아한다. 이는 늘 나의 창작 욕구를 부추기는데 일조한 취향이기에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성정이기도 하다.


  공황장애 초반 혼란스럽던 시절, 타인이 내게 가할 수 있는 극단적 위험성에 대한 재앙화 사고를 몇 번인가 떠올린 후 그런 자신에게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절대 그러지 말자고 결심한 바 있다. 내가 나를 못 믿어 생긴 병인데 죄 없는 타인까지 불신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찮은 객기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결국 나는 항상 세상과 사람을 믿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별다른 제약을 스스로에게 두지 않은 채 자유롭게 움직여왔다. 

그런 내가 이제껏 아무 일도 겪지 않고 지나왔다는 것은 분명 피조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덕분일 것이며,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좁은 곳에 가두기보다는 객기든 믿음이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자유롭게 활개하고 싶은 내 의지를 지지해 주고 계신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이제 와서 밤을, 사람을 경계한다면 지금껏 부어주신 보호의 은혜에 감히 도전장을 내미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


  하나님께서 내게 미래염려를 부추기는 메시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어 자기 방어를 강화하는 메시지, 두려움에 잠식되어 내 안위와 편의에 집착하고 고착을 유도하는 메시지, 세상과 타인을 향한 믿음과 사랑보다는 불신과 의심을 장려하는 메시지를 그 공의와 사랑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은사로 주실 리 없다는 생각은 합당하게 여겨진다. 

염려로 대비하지 않는 내가 설령 험한 일을 당해야만 할지라도 그 또한 내게 필요한 일이기에 배비해 두신 것이 틀림없기에 이겨낼 힘도 그때 함께 주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전까지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오직 이 순간 현재만을 바라보며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내정된 운명을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자가당착의 생각들은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안'을 '은혜'로 둔갑시키기. 살다 보면 내가 합리화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고 싶은 정신승리의 유혹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현재 당장 필요하거나 절실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합리적 대비'를 위한 노력을 미리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합당한 메시지를 내게 전달하셨다면, 그것은 오직 나를 담대하고 의연하게 만들기 위한 것, 일꾼으로서의 기반과 토대를 보다 탄탄하게 구축하기 위한 것, 자신감을 상승시켜 활동 반경을 넓히기 위한 성질이어야 마땅하지, 적어도 '염려'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하루의 말미에서 참여한 조직 신학 마지막 여덟 번째 수업은 정말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었고, 마음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세상을 통해서 드러내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정말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나 혼자 멋대로 하는 염려란 그 거대하신 뜻 앞에서 부끄럽도록 하찮다.

알파와 오메가, 시작이자 끝은 이미 총체적이고 일원적이며 원형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에서 완성된 한 폭의 더할 나위 없는 그림이다. 

그 완전함의 알고리즘으로부터 아직 데이터를 전송받지 못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각기 만드는 변화 속에서 그 '전송의 타이밍'을 기다릴 밖에.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의지 또한 완성된 원형의 요소가 인간의 차원에서 해체되어 하나의 물리적 '과정'으로서 인지되는 계제인가?

일찍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발상조차 시간의 지배를 받는 저차원에서 만들어낸 인간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서 일찍이 남기신 "이제 다 이루었도다"는 말씀 하나를 기폭제로 삼아 모든 것은 시뮬레이션 범주에서 선제된 사건만큼 미지의 어스름에 잠겨 있던 데이터가 활성화되고, 일련의 도미노처럼 줄지어진 시공간이 빛으로 증폭하여 회명을 밝혔으니. 


  섭리란 곧 '연유'이자 '까닭'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이 차원에 함께 지으시고 불완전한 인간더러 그것을 감당해야게끔 하신 까닭이 있다면, 비록 인간이 전부를 납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전체 그림의 조화를 위한 하모니와 어우러짐의 연유가 있으며, 그 뜻은 매우 '공의롭다'고 한다. 

그러니 하니님의 계획과 섭리에 관심을 두고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곧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주를 확장하고 올바른 시선을 일깨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섭리는 타인과 세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인격적 개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 사람의 인격은 단일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 쉬고 있다. 인간의 내면 세계 또한 하나의 거대하고 복잡한 생태계이자 소우주로서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이루는 제각각의 구성 요소들끼리 서로 부딪히고 반목하지 않고 조화로운 하모니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시기 위한 통증과 연단을 제 때에 내려주시니, 그로부터 피어나는 추동이 이끄는 대로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의지만 놓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대로 충실히 움직여 그 사랑을 실증해 나가는 바가 된다.


  '자유 의지'를 허락받은 자여, 단지 아직 모를 뿐 이미 정해진 것을 염려하는 바보가 된다면 도대체 웬 어처구니없는 사단인가, 염려하거나 영위하거나, 어차피 내정된 결과는 절대 바뀌지 않으니, 나를 온전히 내맡기고 순종하는 자일수록 평강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당연지사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아직 나는 '안심'보다는 '불안'이 더 친숙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불완전한 자가 일어나지 않는 미래를 염려로 상정하는 공식의 습관을 떨구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얼마나 자유롭고도 온전하게 부합하여 '피트'되어 있는지 그 감각을 내면에서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꾸준히 견제해 가며 믿음과 사랑을 학습해 갈수록 모든 자극의 느낌에 대해 일삼아 오던 유불리의 판단을 포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적 데이터의 수신을 영감의 형태로 더 부어주실 것이 틀림없기에, 한 어리석은 영혼의 어둡기 그지없던 눈도 어느덧 점차 환하게 개안하기에 이를 것이다.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변화하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된 우리들의 모습이 적어도 유기된 자가 아닌 빛의 존재로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섭리에 대한 모든 고뇌는 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다고도. 

내 믿음도, 사랑도, 변화도 모두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정해 두고 계심을 알고 내가 고뇌를 통해 그 뜻을 구하고자 애쓸수록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책임과 역할이 확장되고 사랑의 헌신과 기여에 유리한 입지를 얻어갈 것이란 사실만큼은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는 명제가 된다.

그러니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말자. 등 뒤에서 불어와 내가 응당 나아가야 할 정착지를 향해서 밀어주는 숨결의 정동에 가만히 귀 기울일 수 있다면 그 순간 위축되고 움츠러드는 마음 따위 전부 흩어져 날아가버릴 것임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은 예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