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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Apr 05. 2023

몰입의 힘

포기하지 않는 뇌가 곧 행복한 뇌


  '몰입'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전에는 단순하게 '집중된 상태'를 몰입이라고 여겼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대상에 흠뻑 빠진 상태, 신경학적으로 본다면 도파민이 활발하게 분출되고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쨌든 몰입된 상태라는 것은 무기력과는 정반대로 의욕적이고 도취되어 있는 모습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공황장애 이전까지는 흔한 몰입 그 이상의 몰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본능에 이끌리듯이 어떤 대상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경험이 반복되어 하나의 도파민 중독 상태가 내면적 공식으로 학습되는 일은 매우 흔한데, 그중에서 진정한 충만과 자족의 궤도를 그리며 내적자존으로 환원되어 돌아오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은 것 같다.

즉 몰입의 세계에는 내 순수한 개성과 무관하게 유전자적 본능의 노예가 되어 내가 지닌 본래의 가능성을 되려 억압하게 만드는 탐욕과 집착의 몰입, 몰개성하고 말초적인 몰입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진정한 몰입이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어려움에 직면하는 용기', '근면성실한 노력', '대상에 매료된 자의 열정'에 중독된 뇌로부터 만들어진다.

이러한 키워드들로부터 견지하면, 진짜 몰입하는 자가 되는 조건에는 양극단에서 서로 충돌하는 강한 내적 갈등의 제동이 기본값으로 상정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우리 뇌는 모순적이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는 한편 성장기 이후로는 오직 스스로 사용하는 만큼만 활성화된다고 한다.

사람은 아프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익숙함에 대한 고착으로 개체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전적 본능에 의해서 인간은 가능하면 뇌를 쓰지 않고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쪽으로 태만해지는 것이 당연하기에 나란 존재가 실은 무엇이 어떻게 가능한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지' 하는 합리화가 무기력인지도 모르는 진실이 보편적 삶의 양태가 되었다.


  그 틀을 스스로 깨고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근면성실한 '사유 활동'에 중독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고 낯선 영역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직면으로 발생한 난제나 혼란에 대해서, 염려가 정제된 고뇌가 동반된 순수한 생각 행위로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납득하며, 현시적으로 구조화된 규명과 해결의 아웃풋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풀어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몰입에 대한 각인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고 쉬운 것이 아니기에 엄청난 인내와 용기와 집중력의 근면함을 요구하는 한편, 포기와 유보와 합리화 등 무기력에 의한 게으름의 유혹도 함께 나를 점령한다.

그런 악조건을 딛고서 강한 의지로 깊이 몰입해 본 것에 대해서는 뇌는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의식은 잠시 쉴 때조차 무의식은 멈추지 않고 해결을 위해 모색하고 활동한다.

그 부단한 열정의 힘이 곧 지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도파민 생성과 유지의 올바른 활로가 되기에, 자신의 소망에 열정으로 매료된 사람은 삶에서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늘 행복하고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살고자 할수록 나를 아끼지 않기, 미리 유불리를 재고 계산하지 않기, 고난과 혼란의 땅에 나를 내던지기,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신념은 무식하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뇌과학이다. 포기할 줄 모르는 근면한 뇌가 곧 행복한 뇌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자기 극복 노력의 과정에는 '과몰입'이란 있을 수 없으며, 내가 결과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염려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 한 어떤 높은 이상을 품든, 어떤 직면과 도전의 과단을 내리든, 그 과정에서 몰입하는 고뇌와 사유 행위 자체로 뇌의 과부하가 될 일은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적 유보'라는 것은 막다른 곳에서 막혀버린 사안에 소요되는 물리적 에너지만을 잠시 멈추고 일시적인 휴식을 취할 뿐, 그 일에 대한 집중과 해결에 대한 내적 의지까지 멈추거나 게을러지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다.

내가 믿음과 소망을 품고 근면성실하게 고뇌하기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의식에서는 설령 잠시 생각을 멈추고 있더라도 내면에서는 계속해서 그 사안에 대한 집중을 유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서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의 특성상 생각을 멈추는 것이 매우 어려운 사람이다.

염려를 할 바에야 생각을 말아야한다는 지침은 실상 내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버젓하게 생각이라는 행위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더 염려가 정제되어 순수한 사유의 성질로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여전히 염려의 불순함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많은 경우 생각을 통해서 혼란을 염려하기보다는 영위하는 쪽에 더 무게가 기울어가고 있음이 체감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시시때때로 나 자신을 향한 이상스러운 질문, '내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있지?'라는 놀라움을 담은 의문형의 깨달음으로 나타나는데, 분명 이해한 기억이 없는 난제들에 대해서 이미 이해하고 있음이 비의지적으로 갑작스레 실증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도파민을 끌어내는 공식이 그리 단단하지 못해서 글을 쓰는 도전과 직면의 과정에서 염려와 회의와 의심과 불안으로 흔들릴 때가 많다. 하지만 생각의 회로가 꼬여 두려움과 혼란이 찾아오는 상황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이를 사전에 예방하거나 기피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깨달아가고 있다.

그런 유혹의 힘이 거세지는 때일수록 진정으로 몰입하는 법을 아는 가장 큰 기회가 된다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동반하여 찾아오는 행복의 누적을 통해 체득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몰입의 노력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의 뇌는 마치 '과부하가 걸린 듯'한 신호를 보내서 나의 염려와 두려움을 유도하고 이 사안으로부터 손을 놓아버리기를 종용한다.

때문에 오히려 반복적으로 겪어나가며 이 혼란의 느낌은 착각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섭리와의 조화를 체득하는 기쁨의 쾌감이 될 수도 있음을 근면하게 주지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도전이 아직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단지 지금은 내 필드가 아닌 것일 뿐, 그걸 구태여 '과부하'라고 단정 짓는 것도 천동설의 자기애적 사고방식이다.

그만큼 나의 작은 존재로는 전부 감당할 수 없는 신비와 비밀이 가득한 경외로운 섭리 아래에서 이렇게 존재할 수 있음에 한껏 매료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무한한 감사를 느낄 뿐, 현전의 세상, 이 시뮬레이션의 차원은 내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다시 묻고 답한다. 진짜 '몰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료된 대상에 대한 열정이 모든 고난과 혼란을 이겨내기에 끝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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