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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Apr 15. 2023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내가 가장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

  공황장애로부터 파급되어 반드시 내가 뚫고 지나가야만 하는 모든 증상 중에서 가장 경계하고 기피하는 증상은 '우울'이라는 정서증상이었다. 

제아무리 대항하기 어려운 두려움이나 악습일지라도 강한 의지만 살아 숨 쉰다면야 모든 고난은 변화를 위해 정성과 애정을 쏟아붓는 법을 알기 위한 연습의 과정이 되고, 실제로 태생적으로 열정적이고 낙관적인 나의 성향 덕분에 종내 통증을 쾌감으로 해석하고 보람으로 누리게 되는 일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나를 사로잡는 '우울' 만큼은 좀처럼 영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진짜 '우울'이란 슬픔, 분노, 자기 연민, 자격지심 등 억한 심정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적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것도 아니고, 회의감과 박탈감 등으로 무기력하여 움직일 의욕이 없는 번아웃적 상태인 것도 아니다.마치 대상으로부터 열 수 있는 모든 문을 열고 빠져나온 것처럼 냉정하게 가라앉은 '무관심'만이 극에 달한 비현실감에 가깝다.


  대상에 깊이 매료된 자의 진심과 열정이 샘솟는 진입로를 찾지 못해 현실에서 동떨어진 고립무원에 홀로 서서 아무것에도 몰입할 수 없는 우울감은 뚜렷하고 구체적인 사고증상이 파급하는 자의식 과잉의 긴장과 예리한 불안이 아니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아득하며 망연자실한 범불안적 혼돈에 휩싸이게 만든다. 

나로서는 그저 이 시기가 자연스럽게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해야 할 일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보니 조절은 어떻게든 하더라도 기쁨과 감사로 현재를 주도하고 있다는 체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때문에 '우울'은 다른 어떤 강렬한 증상과 비교해도 내심 다시 오지 않기를 기대하는 경계 및 기피 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때부터인가 오랫동안 우울을 전혀 느끼지 않고 지내다가, 지난 2월 말미에 시험을 치를 기회로 찾아온 재발의 후속적 여파로 오랜만에 잊지 않고 나를 다시 찾아준 간헐적 우울의 정서는 신기하게도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고, 수주에 걸친 생각의 변화 끝에 미약하지만 어떤 내적 깨달음의 첫머리에 도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인정하기부터'라는 지난 주일 설교 주제가 제시된 순간, 나는 내 고뇌의 방점을 찍어줄 목사님의 말씀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예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기쁨과 슬픔, 열정과 냉정은 빛과 그림자의 상호적 관계와 같이 이질적으로 분리된 성질이 아니라 한 몸이기에 조화롭게 통합하여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가슴으로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내 우울한 상태로부터 필연적 운명성을 잘 느낄 수 없었다. 

내가 겪어야 하는 어떤 통증이든 그 겉모습의 이면으로부터 거대한 섭리의 보살핌과 은혜가 와닿는 순간 진정한 '인정'과 '수용'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실행력이 기쁨과 감사로 뒤따른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이 '무관심'이라는 놈에 대해서도 그 인과적 운명성을 찾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이 또한 네게 필요하니 느껴라 명하신 슬픔에 기쁨으로 수긍하고 순종하는 내가 되어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외로움과 슬픔이 만드는 창조적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첫걸음은 나와 유사한 태생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빛의 면모에만 치중한 채 그림자의 면모를 인정하지 않고 경원시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활용을 모색하고 독자적 가치를 고뇌하며 진화를 위해 나아갔던 선대들의 사례를 공감하여 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고 용기를 얻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우울이 나를 더 큰 스케일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결정적 치트키가 돼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긍하며 인정하기까지의 시간들.

  인지적 악습과 무지에 의해서 발생한 염려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의 오류를 견제하고 공들여 조절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형성된 긍정각인의 궤도를 타는 선순환 속에서 어느덧 불안에 대항하여 다스리는 힘이 조금씩 형성된다. 

그러면 나의 내면은 그 해결에 대한 촉구를 약화시키고, 당연한 결과로 나는 그만큼 편해진다. 그런데 편하면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그게 바로 나임을 안다.


  물론 이제 과거의 나와는 달라진 시야와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며 새로운 이상을 꿈꾸고, 새로운 소망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려 한다, 오직 낙관을 몽상하는 머릿속 꽃밭에서만. 

내게 가능한 사랑의 책임과 기여에 대한 실행에 있어서도 미묘한 한 끗 차이로 조금씩 더 교만과 게으름을 배합하여 자연스럽게 묻어간다고 해서 누가 내게 돌을 던지랴. 

이제 불안을 어느 정도 조절하고 다스릴 줄 안다며 그 자리에 마련된 또 하나의 쾌적함에 적당히 만족하여 멈춰 선 채 고착해도 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방향은 물리적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한계점을 시사하는 끝이란 없고, 나는 이제 그 길의 시작점에서 반 발자국이나 내디뎠을까 싶은 곳에 겨우 선 주제에, 단 하나 얻어낸 변화로 향후 열의 변화를 위한 활로를 틀어막아 편안함을 누리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그게 내 고질적인 천성이자 습관이니까.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깊은 안도를 느낀다. 

우울이라는 슬픔의 관문을 내가 겪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가 절로 올려진다. 

이는 전체주의적이고 원거리적인 무관심이란 모든 것을 동떨어진 곳에서 바라봐야만 비로소 나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타자와 세상을 주인공으로 삼아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제 성질머리의 필연적 고독임을 안다. 

낙관과 자신감에 도취된 열정이 추진하는 의기양양한 실행은 깊은 실존적 몰입의 재미를 유도하지만 때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오류와 허물을 슬쩍 덮어버리는 주관적 기능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제동을 거는 유격된 시야는 하나님께서 찌르시는 강력한 양심의 창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만한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을 보도록 만드시고, 게으른 내가 미처 행하지 못했던 것을 행하도록 만드시니, 그 창조적 알고리즘이야말로 이기심이 자라는 궁벽한 초야에 묻혀 있던 영혼이 깨어나고 싶어 달뜬 에너지의 역학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든 통증은 반드시 모종의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내게 허락된 통증 안에 숨은 그 사랑의 은혜를 감득할 줄 아는 자가 되어갈수록 정확히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순종하여 믿고 사랑하는 실행 속 배움의 길에 자신을 내맡기는 데 저항이 없다. 무쓸모의 하잘것없던 나를 어떻게든 백전노장으로 쓰시고자 이끄시는 인력이 내 안에 작용하는 순간 이미 충만과 행복이라는 이름의 천국이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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