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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May 16. 2023

뜯어보기와 바라보기

사랑믿음교회 제이콥정 목사님의 [관계론] 두 번째 시간

  인색하고 누추한 이야기를 알선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외부를 중재적 시선으로 관찰하고 스케치할 수 있을 정도만큼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살아온 나이기에, 세상이나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대상이든 기대하는 마음이 개입되는 만큼 개인의 입장과 기분이 상대를 객관적으로 형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나는 누군가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아닌 긴밀한 내부로부터의 '관계 맺기'를 포기하는 대신 비교적 편향되지 않은 중립적 입장을 얻은 것에 만족했다. 그 선택으로부터 일부의 진심을 상실했고, 또 일부의 가능성을 얻었다.


  하지만 나 역시 집단적 사회성이 살아 숨 쉬는 유전자를 지닌 개체로서, 완전하게 고립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내게 혈연은 가장 대표적인 예외적 대상이 되었다. 

나를 사랑으로 낳고 길러주시는 시간 속에서 내 모든 자아가 성장했으니 부모님과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불가분의 내적 관계를 맺어버렸고, 동생은 어릴 때부터 세상이라는 클라이언트를 함께 공유하도록 허락된 유일무이의 동료로서 깊은 유착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부모님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지만, 의존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잔존하기 때문인지 습관적으로 왜곡된 기대의 잔여물을 투영하는 뻔뻔함이 남아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비로소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부족한 성정을 보완해 주는 강점을 가지고 있기에 퍽 의지하는 동료인 동생에게는 더 심했다. 오랫동안 이기적이고 집착적인 기대로부터 기인한 내 감정적 아웃풋이 걸러지지 않고 버려지는 쓰레기통이 되어준 것에 대해 나는 많은 자성과 회한을 가진다. 


  그리고 전에 없던 왜곡된 기대가 자칫 파종될 수 있는 미지의 터전이 새롭게 한 곳 더. 

섭리 앞에서 방약무인하던 내가 믿음과 사랑을 배우는 근거지로 삼아갈 곳이 생겼으니, 모르던 지복을 받는 만큼 분명 모르던 미혹도 파고들 것이다. 

하지만 독립적 시선을 유지하고도 진심으로만 열리는 시공간은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갈 나의 미래를 기대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해서,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는 균형추가 점차 맞춰질 것을 안다, 마지막까지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뜯어보는 법'이 있고 '바라보는 법'이 있다고 배웠다. 이는 곧 '몰입하는 견'과 '조망하는 관'일 것이다. 

무아지경으로 전력질주를 하더라도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먼저 가늠한 후 확신의 달음질에 들어가듯,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세부에 깃든 묘미에 구애될 권리가 주어진다. 

  나야 말할 것도 없이 '뜯어보기'의 달인이었다. 

글을 쓰는 것이 직면이 되어버린 순간부터, 어쩐지 예전과는 달리 대상을 낱낱이 해부하고 치밀하게 파고들어 입체적으로 구체화하는 묘사에 몰입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적 표현을 가져다 쓴들 속 빈 강정처럼 그 내부의 중심이 물음표로 비어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옷이야 내키는 대로 지어서 자유롭게 입힐 수 있지만 내가 이렇게 공들여 치장하고 있는 대상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기나 한가?

  

 글을 쓸 때 '바라보기'가 선제되어 대상에 한껏 매료되지 않으면, '뜯어보기'는 그저 공허하고 가식적인 스킬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

 공황장애 극복도 마찬가지였다. 과정을 사랑하지 않으면 노력은 지속될 수 없는 법인데, 두려웠던 증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도 전에 빨리 내 손아귀에서 자유자재로 다루고 싶어서 조급하고 서투르게 뜯어보고자 욕심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바라본다는 것은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가장 첫 단계이고, 내면이 증상을 통해서 나타내고 싶었던 전체의 그림을 조금씩 더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밝아질수록 변화를 위한 과정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증상도, 사람도, 공간도, 경험도, 세상도, 나와 엮인 그 무엇이라도 사랑으로 지긋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장 구석진 곳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비밀을 발견하는 이색적인 재미와 감동을 누리는 권리가 허락된다.

 이는 허물을 비웃기 위한, 나를 드높이는 투쟁을 위한, 몰이해로부터 벽을 세우기 위한 그런 디테일들이 아니라, 결코 밝혀진 바 없는 조화의 요소로 정교하게 구성된 대상의 상서로운 신비를 포섭하기 위한 디테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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