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이라는 이름의 시간 낭비
드라마〈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김 부장이 상무에게 혼나고 돌아와, 그 멘트를 그대로 팀원에게 쏟아내는 장면.
보고서에 들어가는 차트 색상을 문제 삼으며, 집요하게 트집을 잡는다.
그 장면에서 부하 직원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회사, 특히 대기업일수록 보고서 양식과 색상, 폰트는 표준화돼 있고, 그걸 어겼다면 지적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가장 잘못된 건, 업무를 가장한 화풀이였다.
“그냥 죄송하다 말하고 끝내자”라는 말은
겉으로는 상황을 정리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내가 위에 있으니 넌 그냥 듣고 있어라"라는 선언에 가깝다.
논의도, 개선도 없는 무적의 자기 방어다.
나의 개저씨는 어땠을까?
내가 겪은 김 부장은 그 장면과 유사했지만,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멘트 중 하나는 이거였다.
“상사가 시키면 일단 해.”
그는 본인 팀의 직원이 다른 팀으로 옮기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뒤에서 욕을 하고, 업무로 괴롭혀도,
굳이 그 직원을 다른 팀으로 보내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조직 관점에서 보면,
업무나 성향이 맞지 않는 직원은 다른 팀으로 보내는 게 훨씬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걸 싫어했다.
처음엔 추측이었다.
본인과 맞지 않는 팀원에게 폭언과 압박을 가하는 것이 본인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이거나,
관리자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건 추측이 아니었다.
그는 늘 말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고, 결과만 가져오면 된다고.
정작 그 결과를 만드는 건 팀원들이었지만.
팀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업무에 어떤 리소스가 들어가는지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본인은 보고 받고, 보고하는 사람이니, 결과만 가져오라는 태도였다.
리더십의 관점 차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건 리더로서의 무능함이라고 생각한다.
업무 전가, 그리고 괴롭힘의 시작
김 부장이 팀장이 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팀 내에서 영업 실적과 수주 현황 관리를 맡고 있던 직원이,
김 부장과의 갈등 끝에 다른 부서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충원은 없었다.
그 직원이 하던 업무는 별다른 설명 없이 내 역할이 되었다.
팀장의 지시로.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업무는
관리 결산, 실적 관리, 자산 관리 등 속도와 정확도를 동시에 요구하는 일이었고,
야근은 이미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업무가 추가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됐다.
업무를 빙자한 괴롭힘
김 부장이 온 이후, 의사결정 과정에는 장벽이 하나 더 생겼다.
그전 팀장은 팀원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율성을 보장했고,
결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핵심만 보고받았다.
필요하면 본부장에게 먼저 보고해 결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김 부장은 달랐다.
본인을 ‘패싱’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고,
외부 부서로 나가는 모든 문서와 자료는 반드시 본인의 확인을 거치게 했다.
그 결과, 모든 업무의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진짜 힘들었던 건,
업무 자체가 아니라 업무의 형식을 띤 시간 낭비와 감정 소모였다.
그는 종종 나를 붙잡아 두었다.
짧으면 30분, 길면 한 시간. 명목은 언제나 “피드백”이었다.
처음엔 업무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건 왜 그렇게 했어?”
“이 판단은 어떤 근거로 한 거야?”
하지만 대화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평가하는 말이 됐다.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생각을 좀 하고 일해야지.”
“이런 식이면 위에서는 절대 인정 안 해 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원색적인 비난.
본인이 술을 마시는 상황에서 전화로 나에게 업무 이야기를 듣다가 욕설을 계속 내뱉은 적도 있다.
문제는 내용만이 아니었다.
장소였다.
회의실도, 분리된 공간도 아니었다.
김 부장 본인의 자리.
그 자리에 나를 앉혀 놓고, 매일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상황을 훑어봤다.
팀원들 역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듣고 싶지 않지만 들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그 소리를 들었다.
피드백과 폭언 사이의 경계는 늘 모호했다.
아마 의도된 모호함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개선 방향이나 명확한 결정은 거의 없었다.
업무 기준이 정리되는 일도 드물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 쌓인 스트레스,
윗사람에게 받은 압박을
가장 만만한 실무자에게 풀어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결정 없는 피드백의 결과
그 시간이 특히 힘들었던 이유는,
그게 업무를 위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드백이 있다면 빠르게 반영하고, 유관 부서에 다시 제출하고, 결정을 받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실무자에게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닌 속도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김 부장의 ‘피드백 시간’ 동안
나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고,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으며,
방향도 정리되지 않았다.
결과는 늘 같았다.
유관 부서로 나가야 할 자료는 늦어졌고,
결정 지연에 대한 불만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왜 아직 안 왔냐.”
“결정은 언제 나냐.”
설명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었다.
팀장은 나를 붙잡아 두고 화풀이를 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업무 지연의 책임은 다시 실무자의 몫이 되었다.
이게 가장 비열하다고 느꼈던 지점이다.
화를 낸 사람은 평가받지 않고,
화를 맞은 사람만 결과로 욕을 먹는 구조.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 ‘피드백’이 끝나고 나면 업무는 항상 더 밀려 있었다.
그는 여섯 시가 되면 자리를 떴다.
법인카드로 술을 마시러.
그날 쏟아낸 말들에 대한 책임이나 그 말로 인해 생긴 업무 공백은 언제나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었다.
업무를 빙자한 괴롭힘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문서로 남지 않고,
회의록도 없고,
증거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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