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를 미루는 사람은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전 편에서, 개저씨의 피드백이 아닌 화풀이에 대해 기록했었다.
사례는 무수히 떠오르지만 글로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들어 느끼고 있다.
내 분노도 그때만큼은 아니기도 하고.
김 부장의 근황을 들어보니 한직 발령 후 (그것도 리더 직책도 아니다) 예전의 독기가 다 사라졌다고 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아쉬워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게 착하게 살아야지. 사필귀정까지는 아니어도 예상했던, 그럼에도 예상보다는 늦어진 결말이다.
아무튼 못다 한 얘기 중 무능한(혹은 악독한) 리더가 직원을 얼마나 갉아먹을 수 있는지,
사례 하나를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해 보고자 한다.
[뱀의 꼬리를 용의 머리로 만들고 싶었으나]
20XX 년 12월,
김 부장이 선배에게 자료 조사를 지시한 적이 있다.
선배는 1차 자료를 제출한 상태로 개인 휴가를 떠났고, 후속 팔로업은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내 담당 업무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왜겠는가.
김 부장의 지시로.
업무의 시작부터, 업무의 목적과, 보고 대상, 또 어느 형태로 업무를 하라는 지시는 전혀 없었다.
당시 내가 받은 가이드는 - '협력사 중 00 업 형태의 기업에 대한 계약 관계를 조사해라'가 끝.
선배가 1차 조사한 현황에서, 계약서 유무, 담보 설정 유무, 보증보험 유무에 대한 현황을 추가해 1차적으로 보고했다.
"이걸로 되겠어? 고객사랑 계약 관계도 다 조사해 와."
이 말을 남기고, 김 부장은 또 네트워킹을 하러 (본인 법인카드로 술을 마시러) 나갔다.
다시 무한 야근의 지옥.
상식적으로, B2B 대기업인 우리 회사에서, 전체 고객사, 협력사와의 계약 관계를 어느 세월에 정리하고 앉아있겠는가.
시간과 방법은 차치하고, 도대체 이 업무를 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
보고 대상과 목적, 타임라인에 대한 설명은 왜 없는가.
당연히 내가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 부장은 귀찮다는 듯이 "그걸 알아서 뭐 할 건데? 빨리 하기나 해"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
미칠 지경이었다.
우선은 ERP 시스템을 이용하여 1년 치 매출과 비용 항목을 월별로 다운로드한 후,
내부 거래, 일회성 거래 건들을 제외하고, 고객사와 협력사를 나누어 리스트를 산출했다.
(회사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동일한 고객사라도, 시스템 내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문제는, 그 리스트에 대해, 계약 현황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지려면, 현업 부서들을 대상으로 취합 요청을 해야 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생각할 시, 몇 개월의 기간을 가지고 조직 차원의 프로젝트, 혹은 TF로 진행해야 할 규모의 업무였다.
다음 날 김 부장에게 보고했다. 이 정도 규모가 나오고, 최종 정리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그제야 김 부장이 보고 대상을 얘기했다.
최대한 빨리 본부장님께 보고 드려야 한다고. 나에게 업무가 떨어지고 이틀정도가 지난 후였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때도 몰랐다. 본부장에게 '왜' 보고해야 하는지는.
* 당시 본부장의 스타일 상, 그 정도 규모의 일에 대해 툭 던지고 완성도 높은 자료를 빨리 가져오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업무에 빠삭한 사람이라, 빠르게 현황을 보고 받고 후속 지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일주일 후에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감사팀에서 특정 형태의 협력사에 대해 계약 현황을 조사하고, 채권 회수에 대한 대응 방안을 가져오라는 감사 결과에 따른 대응.
(더 자세한 내용은 민감해질 수 있으니 적지 않겠다)
애초부터 협력사 대상 계약 현황을 점검하고, 대응 방안만 작성해 가면 되는 일이었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1-2주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업무였으나,
최종 보고서 작성까지 소요된 시간은 3개월이었다.
3개월.
쉽게 납득되지 않는 기간이다.
이런 식의 수정 요청은 몇 주간 반복되었다.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고, 요구는 매번 달라졌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끝내 설명되지 않았다.
[결정하지 않는 리더]
그럼 왜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일까?
자료 정리 후 보고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결정'이 없었다.
'이거 부족한 것 같은데?', '이걸로 되겠어?', '이 부분도 추가해서 찾아봐'
자료를 가져갈 때마다 김 부장이 내게 했던 얘기들이다.
내가 결정권자가 아닌 입장이지만,
그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감사 결과에 대해 빠르게 대응하고, '본부 차원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라는 보고가 핵심이었다.
후속으로 보완 요청이 나온다면, 그건 또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김 부장은 보고를 두려워했다.
감사팀에 발송하기 전, 본부장에게 1차 보고를 해야 했으나, 김 부장은 본부장 보고조차 계속 미뤘다.
결국 발단부터 한 달이 지난 후, 본부장이 도대체 언제 보고할 거냐 얘기해서 겨우 보고가 이루어졌다.
본부장은 당연히 후속 조치에 대한 가이드를 작성해서 시행하고, 감사팀에 보내라고 지시했고,
감사팀에 보내는 보고서까지가 2달이 또 걸렸다.
보고서 작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담당해서 진행했다.
과정에서 김 부장은 본인이 좋아하는 '피드백'만 했고,
중요도 높은 보고서를, 본인이 주도권을 잡고 쓰지 않는 것이 나로서는 의아했다.
김 부장은 '다 너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했고(요즘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이다),
보고를 할 때마다, 이건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안 든다며 훈수질만 했다.
그것이 그의 피드백이었다.
가끔씩 기분 좋을 때는 회의실에서 혼자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나에게로 와서, 괜히 옆에 앉아 비켜보라며,
자간 조정, 줄 간격 변경 등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들은 잊지 못할 얘기가 있다.
"이건 돈 받고 알려줘야 하는 건데"
어디 좋소 기업 아저씨들이 한다는 소리를, 대기업 김 부장의 입에서 들었다.
그 시절 개저씨들의 멘트는 왜 하나같이 비슷할까.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과 인격 모독이 있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김 부장의 역할 회피와 책임 전가였다.
백 번 양보해서 내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맞다고 치자.
김 부장은 본인의 역할인 '의사 결정'은 확실히 해야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기간 내내, 1차 보고 대상에게조차 보고하는 것을 지연했으며,
보고서 작성 시에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족하다'라는 코멘트만 지속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느 부분을 더 보완할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실무자인 내가 자료 구성부터 보고 방향까지 진행했다.
보고가 지연되었던 것도,
그는 의도적으로 지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안이 꽤나 큰 사안이었으니.
보고서가 지연될 때마다, 그는 감사팀 담당자 중 그나마 대하기 편한 직원을 골라,
굉장히 비굴한 말투로 보고서가 지연되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우리 직원이 무능해서 보고서가 늦게 나온다, 미안하다"
바로 옆에 있던 내가 직접 들은 내용이다.
가장 화가 났던 점은 애초에 빠르게 끝낼 수 있었던 일을,
본인의 노파심으로 인해 크게 벌인 게 1차,
그리고 괜히 나를 찍어 업무로 괴롭힌 게 2차,
김 부장과 함께한 시간 동안 수없이 들었던 감정이지만,
회사 생활 중 처음으로 감정이 이성보다 앞설 뻔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한풀이는 이 정도로 하고,
위 업무 과정을 지나며 느낀 점은 있다.
[보고서, 보고, 어느 것이 우선인가]
업무 시, '속도'와 '정확도'는 모두 중요하다.
보통 둘 중 하나를 먼저 선택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취사선택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물론 둘 다 중요한 업무도 당연히 많고(내가 담당한 결산 실적 등).
일반적으로는, 정확도는 조금 떨어져도 선 보고 후,
후속 조치에 대해 보완하는 형태로 업무는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리더의 역할은, 정확한 현황 파악과, 상황에 맞는 가이드를 실무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나의 개저씨는 선 보고조차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
임원의 질책이 두려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인이 어떻든 명백한 잘못이며, 리더십 부재라고 할 수 있다.
* 드라마 <서울 자가.. 김 부장.>에서, 팀원이 문제점을 발견해 보고를 했으나 (대충 고객 컴플레인 관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김 부장은 팀원과 얘기 도중 상무가 가까이 와 문제가 있냐고 묻자, 바로 '문제없다'라고 상황을 무마한다.
나의 개저씨, 김 부장과 똑같은 모습에 기시감을 느꼈던 장면이다.
[설명하지 않는 리더]
개인적인 생각인데, 리더가 팀원에게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건 리더의 자격이 없다.
누구나, 심지에 연인에게도 기대하는 게,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 있게' 하는 태도이지만,
회사 생활에서 팀원에게, 리더에게, 혹은 동료에게 이런 기대는 무의미하다.
각자 보는 시선, 담당하는 업무가 다르고, 보는 시야도 다르다.
리더가 업무를 지시할 때에는,
업무의 의미(단순히 무슨 업무인지가 아닌,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고 어느 목적으로 쓰일 건지)와 중요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한정된 시간과 다양한 업무 속에서, 어떻게 시간을 배분하고, 업무를 완료할지, 실무자 또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설명이, 실무자의 집중도, 작업 속도, 그리고 동기 부여에 핵심이라는 점을,
그리 길지 않은 회사 생활동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