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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자씨앗 Sep 08. 2022

책과 노니는 집

[책과 노니는 집]은 제목과 그림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 옛 책방, 종이, 언문 소설, 필사, 이야기 들려주는 밤 등 책과 관련한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어 괜스레 마음이 설레었다. 지금처럼 쉽게 널려있는 책이 아니라 한땀한땀 필사쟁이가 자신만의 서체와 개성으로 밤새워 공들여 쓴 책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 뿌듯한 직업임에 틀림없다. 밥그릇, 솥단지까지 맡기고 책을 빌려가는 마을 사람들... 그들에겐 먹고사는 것이 시급하지만 고단한 현실을 위로해주는 한 권의 책, 백성들의 시름을 아파해주고, 덜어주는 책들이 그리웠던 게다. 특히 도리원 누각에 선비와 기생들이 모여 앉아 두둥실 보름달이 걸린 봄밤, 이야기 연회를 여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누각 기둥엔 제등이 걸리고, 오얏꽃잎 가득 은은한 향이 흘러나오는 밤, 이야기꾼 소리에 정신없이 빠져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귀 기울였다가, 박장대소를 했다가,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하면서 관중과 이야기가 교감하는 문화가 지금도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어쩔 때엔 문명의 이기가 편리하다가도 고풍스럽고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 그리울 때가 있다.

12살 장이의 아버지는 소박하게 성균관 근처 배오개 집(현 동대문 시장)에 작은 책방 여는 것이 꿈인 필사쟁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필묵을 보고 자란 장이도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천주쟁이 서책을 필사한 것이 발각되었고 모진 고문과 장독이 올라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를 거둔 것은 아버지와 절친이자 천주학 책을 맡긴 최 서쾌. 책 전반에 비밀스러운 천주학 책을 돌려보는 아낙네와 기생들, 서양 신부의 모습도 간간이 나온다. 왜 이들은 천주학에 매료되었나. 양반집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예닐곱 살부터는 물동이를 지고, 나무를 하고, 제 몫의 노동을 해야 하지만 굶는 날은 허다하고, 가난은 면할 수 없고, 양반들의 무시와 벼슬길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였다. 가난한 부모는 딸을 팔고, 죽기까지 신분의 굴레에 벗어날 수 없으니 어디서 희망을 품겠는가. 그러나 천주학은 달랐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등하며 귀한 존재라는 것이었다(p. 90). 천주님 앞에서는 양반이건, 상놈이건, 백정이건, 천민이건 귀하고 천함이 없다는 것이니 글 읽는 양반에겐 천지개벽할 사상이었고, 중하층민에겐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었다.


자신을 아끼고 예뻐해 주는 홍 교리가 천주학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이는 하인들의 만류에도 서고에서 천주학 책을 모두 골라 불에 태운다. 평소 홍 교리는 "책은 가려 읽지 않으며,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모두 공부가 되는 것이 책"이라 한다. "당장 필요 없는 지식이라도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으니 모든 책이 선생이 될 수 있다"(p. 153)고 믿었으니 천주학 책이 죄인 만드는 것임을 알면서도 비밀스럽게 구했던 것이리라.


청소년 성장소설 대부분이 그러하듯, 장이 역시 아버지의 죽음, 심부름 가는 길의 실수, 홍교리, 최 서쾌, 미적 아가씨와 낙심이를 통해 점점 성숙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장이는 아버지가 꿈꾸던 승교방 배오개 거리에 [책과 노니는 집]이란 언문 현판을 건 책방을 낼 것이라는 암시를 주며 맺는다.


[책과 노니는 집]은 문학동네어린이 대상 작품이다. 심사위원이 언급했듯이 당시 조선 후기 사회와 생활의 정밀한 고증, 어린이 시각을 끝까지 유지하여 그 나이에 맞는 이해 범위 내에서 그려낸 것을 높게 평가한다. 또한 서민 계급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꽃과 새로운 지식 정보가 오고 가는 이야기꾼과 전문 필사쟁이들을 통해 시대의 변화 조짐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어린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어른들과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어른의 모습이 대비되어 어린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도 보게 된다.


사극을 다루면 꼭 세자나 전하가 관여한다. 거의 모든 드라마나 소설이 그러하다. 최근 청소년 역사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정점에 있는 이야기보다는 서민이나 어린이가 겪는 고충들과 어려움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도 다양한 우리네들의 사연들을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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