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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쿠감

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한국인 =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

by Mel

번역가의 책이 한국인은 화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꼭지로 시작하다니. 흥미로웠다. 고작 5년. 외국에 나가있었던 시간은 5년뿐이지만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리고 고객사 미팅을 할 때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기에 반갑기도 했다.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은 화가 많을까. 왜 시청만 가면 손사례칠 정도로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통해서 이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목 터져라 외치고 있을까.

책에서는 한국인을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대상에게는 차마 못 내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거나, 그 화를 삭여서 화병이 생긴다고 했다. 아이러니했다. 화낼 준비가 되어있는데, 정작 화를 잘 내지 못하여 화병이 생긴다. 화를 바르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의 이야기라서 뜨끔했다.


나의 주된 방어기제는 '회피'다. 화가 나고 서운하고 슬픈데, 그 감정을 어떻게 잘 상대방에게 표출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피해버린다. 그렇게 감정을 묵혀두다가 어느 순간 표출한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된통 뒤집어쓴 상대방은 부모님이었다가 이제 남편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사실 이 챕터가 그다음에 나오는 번역 일화들과 긴밀한 연결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서 좋았다. 외국에서 한 발 떨어져 바라본 한국은 아름답지만 답답했고, 흥미로웠지만 돌아가기 싫은 나의 조국이었다.

무튼. 고작 몇 장을 읽었는데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 못했지만 그다음 챕터부터는 술술 읽혔다. 단순히 영상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 연기자의 마음, 그리고 시청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번역가라니, 멋졌다.

상대방의 말을 번역,
내 인생을 번역,
내 여정을 번역.
번역은 항상 정역인가?
아니면 대부분 오역인가?
의역과 직역은 과연 어떠한가?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글귀는,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들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도 옳다. 정작 중요한 의견들은 일방적인 애정이 섞였으니 무가치하다고 여기고 내 인생에 지분 한 톨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경청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이런 완벽한 오역이 있나.”

나 편하자고 하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참 맞는 말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흘려보내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붙들어야 하는데 보통 반대로 생각한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아이네이스를 붙들고 아이와 한 달째 씨름하다가 가볍게 읽은 책. 추천할 만하다. 언젠가 아이네이스도 다 읽고 독후감을 쓸 날이 오겠지.

치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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