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명분이 만나는 곳에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독서후기] '인조 1636'
<권좌를 지키려는 욕심과 대국을 섬긴다는 명분이 만나는 곳에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병자호란"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삼전도의 굴욕"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랑캐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 투항한 군주의 이야기를 우리는 "굴욕"으로 여기고 있다. 군주가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배구고두례는 당사자인 인조가 욕보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조선 더 나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굴욕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병자호란의 "굴욕"에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특정한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랑캐가 중국 중원으로의 패권을 넓혀가면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사건. 야만에 가까운 미개한 족속에게 우리가 머리를 조아린 사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병자호란의 발발은 전적으로 후금(청)의 침입에 의한 것이며,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던 우리에게 북방 반유목 족속이 세운 "청"은 나라 같지도 않았을테니까. 강한 상대에게 침략 당한 약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피해자로서 우리는 굴욕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이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인조 1636-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은 우리가 겪은 굴욕, 그리고 그 책임이 청나라 홍타이지 보다 인조(정권)에게 있다는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관점을 달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청나라의 침입으로만 설명하기엔 그 참상의 칼날이 너무나 깊었다. 2개월에 불과했던 병자호란의 전쟁기간은 우리 민족 내면을 할퀴는 비극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도 그 잔상이 길게 지속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역사를 과거의 것으로만 묵혀두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 정말 대비할 수 없는 전쟁이었나?
책 <인조 1636>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배경에서부터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소현세자의 청나라 볼모시기와 죽음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기술하는 내용과 삽입된 사료를 보고 있으면 "이 전쟁이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안위에만 힘썼다. 반정으로 세운 정권인 만큼 그들에겐 명분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 중 광해군의 "배명금친"을 큰 명분으로 들었다. 임진왜란으로 태풍 앞의 촛불같았던 조선에게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즉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조선의 상황으로 보면 중국의 패권국가인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인조정권이 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자신들의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앞세우며 마음으로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중국의 중원 패권국가가 바껴가는 상황에서도 그걸 모른 채하며 눈 감았다.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을 겪었고 또 후금이 명을 상대로 세력을 넓혀가는 상황을 보면서도 어떠한 대비도 없었다. 그저 북방 반유목민족인 그들을 오랑캐라며 애써 무시했다. 눈 뜬 장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여 이념(숭명배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인조정권은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반정이 궐기될까 노심초사하며 두려워했다. 더군다나 집권 초기 "이괄의 난"을 겪고는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을 훈련도 시키지 않았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난 원인이 기찰의 미비에 있었다면서 공신 한 명당 약 100명 병사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했다. 나라를 지킬 군사들을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자신들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만 치중했다 .
그리하여 광해군 때 그나마 유지 되던 서북면을 지키는 군사체계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풍파는 우리 백성들이 다 떠앉았다. 그때마다 인조는 그저 "몽진" 할 뿐이었다. 공주로,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인조정권에게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하자 당황한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모문룡을 잡으러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이 말은 인조정권이 말로만 숭명배금을 외쳤지. 후금에 대해 전혀 방비가 없음을 드러낸다. 1627년은 북방 반유목국가 후금이 명나라 정벌을 시작한지 10년 이상된 시점이다. 중국은 당나라 이후로는 거의 항상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패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몽골, 거란과 같은 유목국가는 빈약한 생산량을 극복하기 위해 농경지대인 중원을 빼앗아야만 하는 유인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한반도를 침략했다. 고려를 침략하여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 그리고 수 십년간의 몽골과의 항쟁. 인조정권이 고려가 많은 북방국가의 침략에도 나라를 지켜낸 사례에서 배운 것이 세 차례의 "몽진" 뿐이라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후금의 팔기군이 조선의 영토에 이미 들어왔음에도 저들이 왜 왔는지 모르는 인조정권이 얼마나 당시 주변국 정세에 어두웠는지 보여준다. 자신들의 안위에 눈이 멀어 군사들 조련도 시키지 않았음은 적군으로부터 안주성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평안병사 남이흥이 전세가 기울자, 장렬한 최후를 맞으면서 남긴 말에 절절히 드러난다. "장수가 되어 싸움터에서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게 없으나, 군사 조련을 한 번도 못 해보고 죽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병자호란 때는 더하다.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는 왕을 지키려 오는 수많은 근왕군이 적과 싸우다 희생 될 때마저 인조정권의 현실인식은 처참하다. 청에서 왕자를 볼모로 잡을 왕자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인조정권은 가짜 왕자를 보내는 얕은 계략을 쓴다. 그러면서 "소 2마리, 돼지 3마리 , 술10통"을 청의 군영으로 보내 무마하려 한다. 청은 정묘호란 때 이미 겪어 조선의 가짜왕제 계략을 알고 있었으며, 선물로 가져 간것도 "굶주리는 너희 군신에게나 나누어주라"며 거절한다. 당시의 정세와 청의 침입 목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과연 이런 얕은 수로 대응할 생각조차 불가했을 것이다. 더불어 이괄의난, 정묘호란의 곤욕을 거치고도 또 병자호란 직전 '절화교서 탈취사건' 등을 겪고도 말뿐인 항쟁(숭명배금) 이외에 어떠한 대책도 대비도 없었다. 이렇듯 전쟁을 발발하지 않았을 또는 전쟁을 잘 대비할 수 있었을 많은 기회 앞에서 인조정권은 그야말로 전체가 혼군(昏群)이라 하겠다.
* 병자호란, 또 다른 비극을 재생산하다.
역사가 증언하듯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을 겪었다. 조선의 국왕은 곧 국가를 의미하므로, 이는 곧 나라 전체의 굴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조의 굴욕은 비극축에도 끼기 힘든 정도라 생각한다. 병자호란으로 수 많은 살육과 비극이 양산되었고, 인조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어육"이 되어 처참히 죽어간 것은 물론이거니와, 청은 조선의 군민을, 그 수가 수십만에 달할 만큼 많은 사람을 피로인(포로)으로 잡아간다. 그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때로는 가족 전체가 노예로 끌려 간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를 속환이라고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돈 몇낭이면 데려 올 수 있던 가족을 인조정권의 반정공신들이 자신의 가족을 데려오려 값으로 1000냥, 심지어 1500냥까지 지급하면서 속환가격이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올라버렸다. 일반 백성들은 더 이상 속환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속환되어 수 년만에 고국을 밟은 사람들 중에 여자에게는 "환향녀"라 딱지가 붙고 오랑캐에게 끌려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인조정권이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참상 앞에 우리 백성들은 그 고통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꼬리표는 유령이 되어 400년이 지난 후에도 "화냥년"이라 불리며 이 시대의 공기를 여전히 떠돌고 있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왕세자인 소현세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 부부는 청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간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독일인 선교사 "아담샬"과 교류하게 된다. 그는 천문과 역법에 조예가 깊었고, 소현세자는 그런 그와 잦은 교류를 하며 자연스럽게 서양과학문명에 관심을 가진다. 소현세자는 내부반란으로 무너지는 명나라의 마지막을 직접 목도하게 되고, 그렇게 볼모의 이유가 사라지자 청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한다. 때는 1644년 11월이었다. 세자의 귀국 길에는 아담 샬로 부터 받은 망원경, 성경 및 과학서적들이 가득 있었다. 그런데 오랜 볼모 생활 중 크고 작은 질병을 앓았던 세자는 귀국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고 결국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독살'과 같은 이야기도 세상을 떠돈다.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달가워 하지 않았고 귀국 후에도 냉대로 일관한다. 그리고 세자의 사망 후 부인인 강빈과 아들들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으면서 소현세자 가족은 처참히 무너진다. 독살의 진위를 떠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볼모생활이 아니었다면 인조와 세자 부자간의 비극이 이러한 결말을 맞지는 않았을 것 이다.
더불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서양과학문명에 관심이 많았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왕위를 이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조신후기, 병자호란 시기 처럼 주변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우리는 서양열강의 야욕 앞에 또 다시 피할 수 없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어쩌면 우리가 무겁게 치뤄야 했던 고통을 조금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소현세자 앞에 드리운 비극으로 잃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선의 입장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 혼군(昏君)을 섬기는 대가
조선왕조에서 임금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덕(德)"이다. 하늘을 본받고 조상과 백성을 섬기는 것으로 덕치를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때 왕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의 실체적 의미는 자신을 왕으로 받들며 충성하는 백성에 대한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다. 왕조국가에서 모든 강토와 백성이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반정으로 옹립한 인조정권은 늘 또 다른 왕위 찬탈 가능성에 불안해 했다. 그들은 결국 나라와 백성의 안녕 보다도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가장 앞자리에 두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반정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던 "숭명배금"을 목놓아라 울부짖었다. 그렇게 외치기만하면 하늘이 알아서 덕치를 이뤄주리라 여겼던 걸까. 그곳어디에도 우리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인조가 떠넘긴 "불안"의 대가는 비극이 되어 우리 백성들이 치루고야 말았다.
<인조 1636> 이 책은 병자호란을 청의 침입으로 발발한 전쟁이라는 1차적 관점에서 규정하기보다 전쟁의 배경과 진행경과, 그리고 전쟁 이후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여 밝히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조정권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들을 드러낸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객관적 자료에 기반하여)해 보는 것은 역사에서 무엇이 의미있고 중요한지 스스로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역사는 죽어있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문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역사는 얼마든지 현실에 적합한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병자호란과 인조정권의 연대기를 다뤄 독자에게 한층 깊고 다각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