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는 우리 집 강아지다. 토끼처럼 귀여워 큰 딸이 토끼를 뜻하는 ‘bunny(버니)’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 11살 된 버니는 우리 집의 가장 나이 어린 가족이 되었다.
하마터면 버니는 우리의 귀여운 식구가 되지 못할 뻔했다. 작은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큰 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집안에 털이 날리고 대소변을 실내에서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위생상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두 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랐다. 아내도 딸들에게 동조하는 눈치였다. 아내는 어렸을 때 고양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어 동물을 집에서 기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실내에서 키워 본 경험이 없는 나 혼자만 반대자였다.
결국 세 명의 여성들 앞에 내 고집을 꺾고 강아지를 분양받으러 갔다. 조건을 딱 맞추는 강아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작은 딸은 여러 강아지 중에서 유난히 털이 하얗고 눈망울이 커다란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보더니 “바로 저 강아지야”라고 소리쳤다.
우리 모두 그 강아지를 매우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 두말도 필요 없이 곧장 그 강아지로 결정했다. 그렇게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큰 딸이 토끼처럼 귀엽다며 토끼를 뜻하는 ‘버니’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이렇게 작은 딸이 아니었으면 버니는 우리 식구와 영영 만나지 못할 뻔했다.
집에 들여온 버니는 너무 귀여웠다. 생후 2개월도 채 안된 것 같았다. 밥그릇에 밥을 놓아주었는데 자기 밥도 제대로 찾지를 못했다. 밥그릇 주변을 끙끙대었다. 간신히 밥 다 먹고 거실 여기저기로 걸어 다니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기우뚱하다 미끄러지더니 결국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그런데 강아지를 실제로 키워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전에 한 번도 실내에서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없었다. 강아지가 집안에서 배설하는 대소변이 처치 곤란이었다. 도저히 강아지에게 적응이 안 되었다. 강아지가 예쁜 것과 실제 키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나 스스로 도저히 강아지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강아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고심 끝에 아내와 두 딸에게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수 없었다. 딸들에게 강아지를 다시 돌려주자고 말했다. 아내와는 이미 나의 강력한 요구로 합의가 된 상태였다. 두 딸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아내도 같이 울었다.
한참을 나도 망설이며 고민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강아지를 키운다고 상상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강아지를 떠나보내는 마음이야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지겠지 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 혼자 버니를 차에 태우고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버니를 되돌려 주었다.
버니를 돌려준 그날 저녁 두 딸이 집에 돌아왔다. 버니는 이미 내가 돌려주고 집에 없었다. 저녁 12시가 되도록 두 딸은 펑펑 울기를 계속했다. 아내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본인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두 딸을 위로하기 바빴다. 집안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도 마음이 짠하기는 했지만 더 정들기 전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밤 12시가 넘었으니 피곤이 몰려와 잠을 잤다. 다음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나를 뺀 아내와 두 딸은 밤새도록 그렇게 펑펑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던 것이다. 세상 영문도 모르고 나만 푹 잠을 자고 났는데 집안이 온통 그때까지 눈물 바닥이 된 것이다. 두 딸과 아내가 거실에서 함께 울기도 하고, 두 딸은 또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한숨도 못 자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
밤새도록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두 딸은 눈두덩이 탱탱 불었다. 특히 작은 딸은 너무 부어서 그런 얼굴로 학교에 갈 수 없어 결국 그 날 학교를 쉬었다. 이제는 앞뒤를 가릴 여지가 없었다. 아내와 두 딸의 아픈 가슴을 그대로 둘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미래를 걱정할 게 아니었다.
그 날 낮에 바로 다시 버니를 찾으러 갔다. 다행히 버니는 그대로 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버니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세 명의 가슴 아픈 눈물이 아니었으면 지금 11살 된 버니는 우리 집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눈물샘은 꽉 닫힌 조개껍질 같았다. 벌리려고 해도 안에 있는 근육의 힘이 꽉 잡고 있어서 벌어지지 않은 조개처럼 나의 눈물샘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이런 나를 나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눈물 흘리는 일이 많지 않았다. 개구쟁이로 자라면서 마음이 강했던 모양이다. 학창 시절, 군대, 직장시절, 변호사 생활을 지나오면서 살아야겠다는 생에의 강한 의지가 나의 가슴에서 눈물이 흐를 감정의 이완을 용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한국 남성 대부분이 그렇게 쉽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50대가 넘어서일까. 그렇게 막혀 있던 눈물샘에 변화가 왔다. 영화를 보다가 슬프거나 감동스러운 장면이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가 영화가 다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내 눈망울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딸들도 아빠의 눈물을 눈치챘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머리로만 살아오던 나의 삶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가슴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덩달아 공감의 감정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감정이입의 여운이 한참 동안 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조금만 이야기하다가도 왜 금세 눈물을 흘리며 눈을 훔치곤 하는지 이해가 될 듯했다. 그분들에게는 살아온 삶이 냉철한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형의 세계로 가득했다. 80~9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그분들의 삶에는 수많은 기쁨, 슬픔, 아픔의 조각들이 가슴속에 버무려져 있었다. 한 방울 눈물이 아니면 깊은 심연의 가슴속 삶의 조각 하나라도 어떻게 위로 길러 올려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제야 그분들의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또 다른 삶의 영역이 나에게 다가왔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일도 생겼다.
부모님이 모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부모 잃은 아픈 가슴은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50대가 넘어서면서 친구들로부터 부모들의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오는 것이 거의 일상화되었다. 그러다 직접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슬픔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한 참 동안 슬픔을 지체할 수 없었다. 부모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오며 눈물이 흘렀다.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옛날의 한 조각 기억들이 가슴으로 올라오면 내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핸드폰에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보면 슬픔이 찾아왔다. 나중에는 부모님 사진을 보는 것을 좀 멀리했다. 내 마음이 추슬러질 때까지 그랬다.
삶과 죽음이 바로 곁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깨달았다. 삶의 온전한 의미도 모른 채 삶에 대한 겸손도 모르고 내 멋대로 무작정 살아온 느낌이었다.
나의 계획과 의지로 나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만 알고 있었다가,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 절대자의 손길이 내 곁에서 나의 삶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부르시면 먼저 가신 부모님처럼 나도 그분께로 갈 때가 온다는 사실이 바로 내 앞에 실존적으로 다가왔다.
버니는 참 예쁘게 자랐다. 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아프곤 한다. 아내와 두 딸은 버니가 안타깝고 불쌍해서 매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마음이 아파 버니가 경련하는 동안 버니를 위로하며 버니의 머리와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버니를 바라보고 있으면 눈망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흰색 강아지라 온몸이 흰 것뿐인데 얼굴에 눈 두 개와 코 하나, 이렇게 꼭 세 개의 검은 점이 찍어져 있다. 순하고 착한 버니의 얼굴을 꼭 껴안고 얼굴에 키스를 해 준다. 버니는 좋은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살며시 내린다.
버니는 매일 저녁 식사 후 내 산책길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버니가 우리 가족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다에서 걸러내어 해감 된 조개처럼 나의 눈물샘의 근육이 힘을 뺀듯하다. 슬픔이 오면 내 눈자위가 뜨거워지겠지. 슬픔이 기쁨과 뒤섞이며 내 삶의 캔버스가 멋진 색깔로 칠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