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용어에 ‘Act of God’라는 것이 있다. ‘불가항력’이라고 한다. 불어로 ‘Force Majeure’라고도 한다. 지진, 홍수, 해일, 전쟁과 같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천재지변 등의 사유가 발생하면 계약을 불이행하더라도 면책된다는 용어이다.
우리 민법이 고의, 과실 같은 유책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것도 같은 취지이다. 불가항력이 있으면 당연한 면책사유가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계약서에는 구태여 그 조항을 기재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불가항력 조항은 영미권 계약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가 우리의 삶을 덮치기도 한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다. 국가적인 경제 충격으로 수많은 국민들의 삶이 타격을 입은 경우도 있다. 자연재해에 버금가는 불가항력의 인재이다.
나는 회사에서 대리 말 호봉이어서 곧 과장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가정을 이루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한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채 갑자기 불어 닥친 IMF 사태는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나를 그냥 비켜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새한종합금융 회사의 강남지점에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여신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업들에 대한 대출업무가 주 업무였다.
우리나라의 달러가 급격히 해외로 유출되어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금융기관들이 기업대출을 옥죄이자 대기업도 흔들거렸다. 유명한 기아자동차도 부도가 되었다.
내가 담당하던 기업대출도 회수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IMF 이전까지 약 8년간 근무하면서 새한종합금융에서 취급했던 대출 중에 부도 건은 한 두건이었고 부도금액도 단지 몇 억 원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IMF가 발생하자 거의 모든 대출기업들이 부도상태가 되었고 부실대출은 천문학적인 수치로 올라갔다. 1997년 여름부터 다음 해 초반까지 정상적인 근무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야근하며 새벽 4시경에 퇴근하고 잠깐 잠을 붙인 후 오전에 다시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회사 경영진은 물론이고 모든 직원들이 난리가 났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 혼자만 있었으면 두려움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 두 딸과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정말 막막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놓았기 때문에 빚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문제가 되었다. 외환관리를 잘 못한 정부를 비난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문제는 터졌다. 처음 경험하는 국가적인 경제파탄에 평안하던 삶이 요동을 쳤다. 일단은 회사에 남아 끝까지 마무리 업무를 계속했다. 지금 당장 직장은 무너져 가고 있지만 살만한 새로운 미래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기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내 마음의 태도가 중요했다.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다시 걷기 위해 끝까지 버텨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렇게 비상근무를 계속하다 1998년 봄이 끝날 무렵 회사를 명예퇴직했다. 이미 회사도 부실대출이 쌓여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첫 직장으로 입사하여 평생 동안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 나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IMF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태풍과 홍수의 자연재해를 만난 피해자들이 소송까지 벌이며 고군분투하듯 당시의 나도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양인 것 같다. 편평한 수평 능선으로만 가는 인생은 아무에게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도 그랬다. 80~90년을 살아온 그분들의 인생 속에는 험한 일제의 탄압과 6.25 전쟁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IMF사태, Global 금융위기 등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가항력의 사태였다. 현재 살아 계신다는 그 자체로 존경과 찬사를 받기에 족한 삶이다.
앞으로 살아갈 나의 미래의 삶도 시시때때로 골짜기를 만날 것이다. 살아가며 만나는 인생의 다양한 불가항력들.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절호의 기회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우리의 부모님 세대처럼 버텨내고 극복할 수 있다.
불가항력! 그것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기쁨과 축복을 선사해 주는 절대자의 행위(Act of God)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