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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세포가 된 꿈

by 한상영변호사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아내, 두 딸과 함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향해 나갔다. 살던 집을 처분하고 차도 판 후 고시생이 밀집하던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원래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여 같이 공부할 법대생 동료가 없었다. 초반에 먼저 변호사가 된 고등학교 친구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그 친구의 헌신적인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법 공부는 특히 case 스터디가 중요했다. 가상의 case를 놓고 몇 사람이 함께 토론을 하는 방식이다. 토론을 통해 법적인 쟁점이 쉽게 파악되고 2차 논술시험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변호사인 친구가 스터디 멤버를 소개해 주었다. 매일 아침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뒷산의 관악산 자락을 산책하며 case 문제를 올라갈 때 1개, 내려갈 때 1개를 토론했다. 나중에 스터디 멤버 한 명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스터디 그룹은 해체되었다.


그러다 같은 새한종합금융 직장에서 나처럼 퇴직한 후배 1명을 신림동에서 만났다. 나보다 2살 어린 그 후배도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여 법적 지식이 어느 정도 쌓여 있는 상태였다. 다시 아침 일찍 기상하여 관악산 자락 등산을 하며 그 후배와 스터디를 시작했다.


그 후배도 결혼 상태였다. 그의 아내와 자녀는 서울 도심에 거주하고 있었고, 혼자서 신림동에 거주하며 공부를 했다. 신림동에서 공부하다 가족들이 더 이상 합격을 기다릴 수 없어 결국 사법시험을 포기했다. 나중에 가족 모두가 우리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토론 스터디 멤버를 졸지에 잃게 되었다. 법 공부는 그냥 눈으로 책만 보아서는 안 되고 case를 같이 토론하며 공부해야 입체감 있고 효율적이다. 어떻게든 스터디 멤버를 구해야 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나이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법대를 나오지 않아 같이 공부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은 멤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아내가 녹음하며 혼자 강의하듯이 공부하는 방법을 차선책으로 제안했다. 녹음을 위해 신림동 높은 지대에 있는 어느 집의 방 한 칸을 빌렸다.


그 방으로 가져갈 법 관련 책들이 많았다. 책을 운반하기 위해 리어카를 빌렸다. 차는 신림동으로 이사 오며 이미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리어카에 가득 책을 실었다. 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야 했다.


리어카는 앞에서 내가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었다. 법 서적은 두께가 두껍고 양도 많아서 리어카 무게가 매우 육중했다. 고지대로 올라 갈수록 뒤에서 미는 아내는 힘에 부쳤다. 아내가 뒤에서 끙끙 대며 힘들게 리어카를 밀었다.


리어카로 운반하던 길 주변에는 많은 젊은 고시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30대 후반의 남자가 아내와 끙끙 대고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한지 흘낏 쳐다보았다.


두 딸까지 딸린 마당에 때늦은 공부를 한답시고 백주 대낮에 애꿎은 아내를 고생시키며 리어카를 끌고 가려니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올라갔다.


빌린 방에서 녹음기를 틀어 놓은 상태에서 법 교과서를 펴 놓고 나 혼자 스스로 소리 내어 강의를 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강의하는 셈이었다. 방안에 나 혼자 밖에 없었지만 말로 소리 내어 낭독을 하면 머릿속에서 법적 쟁점이 잘 정리가 되었다.


몇 개월 동안 혼자 녹음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방에 갇혀 나 홀로 강의하며 녹음하는 것도 힘에 부딪치고 재미도 없던 차에 아내가 case 스터디의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시 독서실로 공부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지난번처럼 많은 수험 책들을 리어카에 싣고 독서실로 운반해야 했다. 리어카에 가득 책을 실었다. 독서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이상한 듯 했다. 아마 그들은 아무런 의도도 없었을 것이다. 나 스스로 혼자만의 자격지심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거운 책을 독서실로 함께 나르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힘을 다시 내었다.


정말 사회적으로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9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새한종합금융 회사의 번듯한 명함도 더 이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이 학교의 어떤 서류에 아빠의 직업을 기재해야 한다고 했다.


“아빠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해야 해?”라고 물었을 때 나의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나로 인해 어린 딸이 학교에서 혹시나 무시나 당하지 않을까 딸에게 정말 미안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내와 두 딸이 나와 함께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이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끙끙대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있는 리어카 안에는 소중한 우리만의 희망과 기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2차 시험은 논술시험이기 때문에 case 스터디가 필수적이었다. 아내의 제안으로 법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아내와 case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게 가능할까 의문이 되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아내는 이미 1차 시험을 볼 때마다 시험장에 같이 동행하며 계속 나를 전심으로 지원해 주고 있었다. 1차 시험에서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아내는 나의 긴장감을 풀어 주고 소화가 잘 되도록 운동장 한가운데서 나와 함께 우유팩으로 제기차기 놀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제기를 차는 우리를 보고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아내는 나의 스터디 멤버처럼 마을 뒤 관악산 자락 산행을 같이 했다. 산을 올라가며 나는 특히 2차 시험과목을 중심으로 하나씩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상법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법을 좋아하지도 않고 전공도 하지 않은 아내가 나의 설명을 이해할리가 만무했다. 설명하는 나 자신도 위 법률과목들은 많이 공부해 놓지 않은 상태라서 설명을 버벅대었다. 아내가 하는 일은 내가 어떤 법 내용을 아내의 귀에 대고 말을 하면, 아내는 그저 나의 설명에 장단을 맞추어 “응, 응”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내가 산에 오르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에게 독백으로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라도 산에 대동하면 일단은 대화의 형식이 된다. 나로서는 아내가 이해하든 말든 아내를 상대로 말을 하며 법적인 내용이 내 머릿속에서 명쾌하게 입체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산에 올라가면 적당한 곳을 자리 잡고 아내와 우유팩 제기차기를 했다. 그렇게라도 나의 건강을 챙겨야 했다. 아내는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건강을 위해 제기차기를 같이 해 주었다.


제기차기가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며 나는 다시 아내 귀에 대고 어려운 법률용어를 사용하며 법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여전히 “응, 응”하고 응답한다.


그렇게 산 밑으로 내려오면 몸이 피곤하여 관악 청소년 회관 실내로 들어갔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나는 아내 귀에 법 내용을 소곤거린다. 피곤에 지친 아내가 “응, 응”대꾸하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나지막하게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아내의 귀에 나의 법 내용 설명은 계속된다. 아내가 듣든 말든.


어느 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뒷산으로 가며 여느 때처럼 아내와 스터디를 했다. 물론 일방적인 나의 독백과 같은 설명이지만. 아내 귀에 대고 법 내용을 설명하고 아내가 또 형식적인 응답을 시작한다.


앞에서 저만치 가고 있는 작은 딸이 아빠를 뒤돌아보더니 엄마가 대답할 타이밍을 얼른 가로챈다. 그러고서는 “응응 그런 거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해 줄게”라고 말하고는 자기가 “응, 응”하기 시작한다.


작은 딸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다. 잠시 아내 대신에 작은 딸 귀에다 법 강의를 시작한다. 참 신기하다. 어린 딸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응, 응” 대답만 해주는데도 내 머릿속에서 법 내용이 잘 정리되는 것이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엉뚱한 방법으로 2차 시험을 준비했다. 1년 6개월을 아내와 그렇게 준비했다. 온 가족이 함께 2차 시험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아내는 나와 함께 했던 그런 희한한 스터디 기간이 끝나고서도 그 뒤로 한 참 동안 아내 귀에서 내 말이 계속 맴도는 것 같다고 했다.


2003년 여름에 본 두 번째의 2차 시험에 최종 합격하였다. 2차 시험은 특히 행정법이 어려웠다. 그해 그 과목에서 대거 과락이 발생하여 아깝게 떨어진 수험생들이 매우 많았다. 나는 행정법을 포함한 2차 시험 모든 과목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귀에 속삭이며 내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정리해 놓은 탓이다.


4년 6개월에 걸친 전력 질주가 마침내 끝났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 가능한 도전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그 길에 아내와 두 딸이 함께 흘린 땀들이 가득하였다.


리어카에 실은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 아내의 귀에 속삭이던 수많은 단어들, 좋아라고 하며 우리의 길을 따라와 준 두 딸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앞날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삶의 세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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