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삼모작 인생을 생각하며

by 한상영변호사

논바닥 한가운데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참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발가락에 쥐가 났다. 어머님께서 빨리 논에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물 담긴 찰진 흙바닥을 간신히 빠져나와서 나 혼자 내 발을 요리조리 마사지했다. 같이 모내기하던 동네 어른들이 안타깝게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님은 어린것이 학교는 가지 않고 집안일한다며 나무라는 눈치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되던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또래 친구들은 5~6월 농번기가 되면 보리, 밀들을 수확하랴 모내기하랴 너무 바쁜 나머지 며칠간 학교를 쉬고 집안일을 거두는 일이 흔했다. 일손이 모자란 농촌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나에게 집안일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며 학교를 쉬지 못하게 단속했다.


아버님은 직장인 학교에 출근하느라 낮에 집에 안 계셨다. 형제들도 이미 모두 집을 떠나 도회지로 나간 상태라 집안에 어머님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내 마음 딴엔 어머님을 도와준답시고 맘대로 학교를 하루 쉬어버린 것이었다.


추운 겨울철 내내 차가운 논바닥에서 자라던 보리들이 봄이 되면서 생명력 넘치는 푸른 벌판을 이루더니 여름이 채 되기 전에 금세 황금빛으로 변했다. 이때쯤이면 마을 사람들은 보리를 수확하랴, 벼 심을 논을 만들기 위해 다시 땅을 갈아엎으랴 정신이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족 식구 모두가 들판에서 지냈다.


본격적인 여름철로 들어가면 모내기가 끝난 논에는 다시 새로운 푸른 벼 잎사귀들이 하늘을 향해 찌르듯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그러다 한여름 지나고 가을로 깊어지면 푸른 벼들도 지난번 보리, 밀처럼 다시 황금빛으로 변할 것이었다. 농민들에게는 두 번의 수확이 되는 것이다.


자연이 이모작으로 우리에게 풍요를 주듯, 어떻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요즈음에는 이모작이 아니라 삼모작 인생이라고 한다. 50대까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직하여 일모작을 끝낸 후 60대부터 대략 20년간 이모작을 보내다가 80대 중반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이 이모작이다. 삼모작은 100세를 종착점으로 보고 80대부터 100세까지 20년의 세월이 마지막 단계인 삼모작이 된다.


100세를 산다는 것은 예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나이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사람들도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사건을 수임한 고객 중에 가장 나이 드신 분이 당시 103세의 여성분이셨다. 지금은 106세가 되었다. 그녀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녀는 토지의 공유 자였는데, 상대방이 그분을 포함한 공유자들을 상대로 하여 토지의 소유권등기 말소 소송을 제기했다. 공유자들이 나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함께 공동피고로 된 조카뻘 된 친척이 당시 103세의 그분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 주었다. 놀라웠다. 자세가 무척 꼿꼿했다. 식사도 잘한다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80대 중반의 여성으로 보였다.


연세대 철학과의 김형석 명예교수님은 얼마 전에 ‘100세를 살아보니’라는 수상록을 책으로 냈다. 책을 읽어 보았다. 100세까지 살아온 지혜가 아름답게 담겨 있었다. 그 연세에도 여기저기 강연을 다녔다. 책을 펴낼 정도이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100세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인생 일모작을 서서히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다.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다. 나 자신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알 수가 없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지가 된다. 안정적인 공무원과 같은 직장을 제외하고는 이미 직장에서 은퇴한 친구도 많아졌다.


이모작만을 생각할 때는 60대부터 삶을 즐기며 여가를 보내고 소비생활을 하다가 끝나면 되었다. 하지만 100세까지의 삼모작을 기준으로 하면 80대부터 100세까지의 3단계가 우리 앞에 새로 주어진다. 60대부터 여가 단계로 들어가면 무려 40년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삼모작 인생을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건강일 것이다. 육체적 건강을 잘 챙겨야 하고, 정신적 정서적 건강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80대의 부모님 세대를 지켜보며 육체는 건강한데 치매에 걸려 아무런 활동도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정신건강이 지켜지지 않아 치매 같은 질병에 걸린 부모님 때문에 온 가족들이 힘겨워했다. 치매 환자인 본인은 경제 활동은 고사하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집 밖으로 나가도 위험하고, 집안에서도 온갖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치매 환자 1명을 케어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산을 많이 축적해 놓아 보았자 육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어느 하나로도 잃으면 삼모작 인생은 그야말로 힘겨울 것이다.


삼모작 인생에서는 어떻게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경제활동을 무리 없이 해나가며 인생의 종착역으로 가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다간 삼모작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행복을 만끽하며 삶의 과정을 겸손하게 꾸벅꾸벅 걸어가다 보면 황금빛 들판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인 농민과 같은 행복한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keyword
이전 09화삶의 세포가 된 꿈